청동의 화가, 기베르티의 부조
15세기 르네상스 미술은 활기 넘치는 신흥 도시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피렌체는 대단한 권력을 가진 은행 재벌 메디치 가의 후원 속에서 새로운 예술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르네상스의 발생은 비현실적이고 비개성적인 중세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하는 의식에서 시작되었다. 다시 태어난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르네상스는 그 의미 자체가 기존의 종교적 세계관에 대한 도전이며 동시에 인간성을 회복하고 재발견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것은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인간 중심적인 가치관으로 변화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14세기 이래 중세 유럽 사람들은 교회가 전파한 획일적인 지식과 현실성이 결여된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새롭고 풍부한 지식들을 축적함으로써 의식의 대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교회와 봉건 세력을 중심으로 한 권력의 붕괴를 야기했으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염원을 촉발시켰다. 아울러 신흥 도시를 중심으로 경제를 우선으로 하는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상인과 시민 계급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인간의 개성을 존중하는 휴머니즘으로 발전했으며 급기야 르네상스의 출현을 이끌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중세에서 거부하고 멸시했던 인체의 형태미에 대한 연구가 열정적으로 이루어지고 고대로 복귀하고자 하는 부활의 열망이 표면으로 드러났으며 신학이 아닌 과학에 의존하는 합리적인 학문 탐구가 이루어졌다. 르네상스는 전통적인 관습에 대해 반성하면서 고대의 것을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능가하고자 했으며, 당연히 모든 분야에 걸쳐 새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사상과 자유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 르네상스의 이러한 특징과 목적은 피렌체를 시작으로 베네치아, 북유럽, 플랑드르, 독일 등으로 퍼져나갔으며 그 지방 및 나라의 환경과 조건에 충실하면서 새로운 미를 정립하고 개척해 나가는 데 힘썼다.
15세기 초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초기 르네상스 미술에 있어 그 변혁의 초석을 마련한 사람은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1455)이다. 그는 피렌체 중심에 있는 산 지오반니 세례당(피렌체 세례당이라고도 함)의 두 개의 청동문 부조 작가로 유명하다. 이 세례당의 남쪽문은 1336년 안드레아 피사노가 만들었다. 세례당 북쪽문(제1청동문) 제작은 피렌체 도시 계획의 일환이었으며 공화국의 위대함과 자부심을 표현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1401년 당시 옷감 상인이었던 칼리말라는 '이삭의 희생'이란 주제로 북쪽문 제작자를 공모했다. 모두 7명이 응모했는데 그중에는 조각가 도나텔로와 건축에서 르네상스 양식을 확립한 브루넬레스키 그리고 시에나의 거장인 야코프 델라 퀘르치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거장들을 누르고 기베르티가 당선되면서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공모의 주제였던 '이삭의 희생'은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려고 하는 순간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아브라함을 제지하며 그의 아들 대신 양을 제물로 희생시켰다는 극적인 내용이다. 기베르티의 <이삭의 희생>이 마지막까지 경쟁했던 브루넬레스키의 <이삭의 희생>을 누르고 피렌체 시민의 호응을 얻어 선택된 데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의 탁월한 주조 기술을 빼놓을 수 없다. 브루넬레스키가 시도한 제작 방식은 각 인물과 물체들을 따로따로 주조하여 납땜으로 용접했던 것에 반해 기베르티는 전체적인 조화와 내용의 통일성을 위해 모든 장면을 한 번의 주조로 완성했던 것이다. 따라서 전체적인 배경과 인물들은 자연스러움을 보여줌으로써 마치 회화 작품을 대하듯 깊은 공간감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또한 인물 표현에서는 고대 조각의 전통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르네상스의 뜻을 충분히 수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기베르티는 이 북쪽문 장식에 서사적이고 힘이 넘치는 로마네스크와 우아한 고딕 조각을 부드럽게 융화시켰고, 주제 및 건축적 배경과의 조화를 위해 공간적 깊이감에 한층 심혈을 기울였다. 그 후 기베르티는 구약의 장면을 내용으로 동쪽문(제2청동문) 장식도 의뢰받게 되는데, 오랜 기간에 걸쳐 새로운 양식을 시도하게 된다. 즉, 고딕적인 요소를 버리고 기독교 사상과 인간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종합시켜 르네상스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또한 능숙하게 원근법을 사용함으로써 '청동의 화가'로서 능력을 유감없이 펼쳐 보였다. 동쪽문은 세로 2열로 된 5개의 사각형 패널로 되어 있는데 총 10개의 이 패널들을 저부조와 고부조를 혼용하여 정교하게 조각되었다. 원경의 인물은 편평하게 처리하고 근경의 인물은 고부조로 처리하여 공간감을 살렸다.
극적이고 서사성이 짙은 구약성서를 주제로 한 각 패널의 장면마다 상당한 긴장감이 느껴지며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엿보인다. 동쪽문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후에 미켈란젤로에 의해 <천국의 문>이라 불렀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화가나 조각가들에게 부조의 원형적인 규범을 제시해주고 있다. <천국의 문> 일부에 기베르티 자신의 자소상과 아들의 얼굴을 등장시킴으로써 예술가로서의 존재를 부각시켰는데 자기 얼굴의 특징을 사실적이고 지적으로 묘사했다. 금세공사 기베르티는 50년이란 세월을 이 두 개의 청동문 제작에 바쳤으며 이 문을 통해 중세적인 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강렬하게 보여주었다.
기베르티는 청동문 외에도 <세례자 요한>, <성 마태>, <성 스테파노>, <시에나 예배당의 세례반을 위한 부조> 등을 제작했다. 또한 브루넬레스키와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 건설에도 참가했으며, 그의 자서전적 기록인 「비망록」은 예술론으로도 귀중하게 여겨지고 있다.
르네상스의 아버지 도나텔로
초기 르네상스에 고전의 인체미를 재건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사람은 당시 최고의 조각가이면서 르네상스 양식의 창시자로 불리게 된 도나텔로(Donatello,1386-1466)였다. 그는 중세의 건축 조각에서 볼 수 있는, 벽 속에 갇혀 있던 조각을 3차원적인 조각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놓았으며 표현 방식에 있어서도 사실적인 관찰을 바탕으로 생동감 있는 인체 조각을 만들어냈다. 도나텔로의 조각은 후세의 많은 조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그를 일컬어 르네상스의 아버지라고 한다. 도나텔로는 젊은 시절 기베르티의 청동문 제작을 도우며 그에게서 청동 조각 기법을 배운다. 그 후 기베르티의 문하에서 나와 고전과 고대의 조각을 연구했고 새로운 시대의 이상을 보여주는 조각상 <성 조르조>를 제작했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암흑기의 중세에서 벗어나 완전한 독립을 이룬 조각상을 고대 이래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다. 긴장감이 엿보이는 굳센 자세의 이 영웅은 심오한 내면적 표정과 잠재적인 정열을 그의 얼굴에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15세기 르네상스 정신에 합당한 젊은 군인의 전형으로서 그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성 조르조> 조각상 아래 좌대에 조각된 부조 <용과 싸우는 성 조르조> 역시 섬세하고 밀도 있는 표현으로 관심을 끈다. 이 부조는 '스티아치아토'를 사용한 최초의 예이다. 이 말은 매우 얕은 저부조를 일컫는데, 돌에 조각했다기보다 그 위에 그렸다는 표현이 어울린다고 하겠다. 바람에 휘날리는 풍경 묘사와 합리적인 원근법으로 무한한 공간의 깊이를 보여준 첫 작품이다.
도나텔로의 가장 유명한 르네상스 조각 중 하나로 손꼽히는 <다비드>상은 로마 시대 이래 최초의 지지대가 없는 완전한 단독 입체물이다. 성서 사무엘 전서 제17장은 다비드가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이야기가 주제이다. 도나텔로는 용사 다비드를 젊고 아름다운 소년으로 묘사하여 분위기를 한층 극적이고 관능적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잘려 나간 얼굴을 왼발로 밟고 있는 모습은 승리감에 도취해 있는 심리적 상태를 읽을 수 있게 한다. 작은 몸매의 부드러운 형태에서는 생동감과 섬세함이 느껴지지만 미소년의 얼굴에서는 역설적으로 강인함이 묻어 나오고 있다. 도나텔로가 만들어낸 이 <다비드>는 해부학적으로 완벽할 뿐만 아니라 형태미와 균형미를 고루 갖추고 있어 고전적인 정취를 느끼게 한다. <다비드>는 제작 연도가 미상이라 많은 논란과 추정을 낳았는데, 메디치 궁에 등록된 것으로 보아 메디치 가를 위해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도나텔로는 피렌체에서의 창작에 만족하지 못하고 군대 지휘관인 <가타멜라타 청동 기마상>을 의뢰받으면서 파도바로 이주하여 이 작품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기타멜라타 장군의 베네치아 공화국에 대한 충성과 봉사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이 기마상은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기마상>과 비교되기도 한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규모가 장대하고 균형과 조화가 두드러지며 인물의 성격을 위엄 있게 표현한 점이다. 가타멜라타 장군의 갑옷 표현은 15세기 당시의 구조와 형식을 잘 따르고 있으며 세부적인 묘사는 고대의 것을 차용하고 있다. 얼굴 표정에서 보이는 꼭 다문 입술은 무게 있는 성격을 느끼게 하며 양미간의 긴장감은 인물의 강인한 개성을 잘 나타내준다. 이 기마상은 군인으로서의 힘과 인간적인 우수 그리고 지적 에너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걸작이다. 도나텔로는 이 기마상에서 육체적인 힘으로 다스리는 영웅의 모습보다는 고귀한 인격의 소유자로서 장군의 모습을 흠잡을 데 없이 표현하였다. 조금 둔해 보이는 말의 자태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지만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한 탁월한 기념상은 도나텔로가 제작한 독립 조각상 중 최고로 기억될 것임에 틀림없다.
떠돌이 생활로 말년이 고독했던 천재 도나텔로는 건축의 브루넬레스키, 회화의 마사초와 함께 르네상스를 연구하고 개척한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승, 베로키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승이었던 이유로 제자와 비교당하는 괴로움을 겪어 다소 불행했던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1435-1488)는 메디치 가의 후원과 비호를 받으며 도나텔로에 버금가는 야심을 갖고 그 뒤를 이었다. 금세공인이자 화가, 조각가였던 베로키오의 작품은 기베르티의 영향으로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메디치 가를 위해 제작된 <돌고래를 안은 어린아이>는 그의 초기 작품으로, 귀엽고 경쾌하며 장난스러움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조각이다. 이 작품은 소재와 형태에서 볼 수 있듯이 장식적인 면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강렬한 조각적 성격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어 정원의 연못이나 분수대에 많이 등장했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모작이 만들어지고 있다. 베로키오는 그의 말년에 가장 빛나고 극적인 작품을 제작하게 되는데 청동 기마상인 <콜레오니 기마상>이다. 1475년에 죽은 페르가몬 출신 용병대장 콜레오니는 그의 전 재산을 베네치아 공화국에 헌납하고 그 조건으로 성 마르코 광장에 자신의 기마상을 건립해 달라고 유언했다. 이에 따라 베로키오가 기마상을 제작하게 되었는데, 원작만 완성한 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그 후 제자들이 청동으로 주조했다. 베로키오는 도나텔로의 <가타멜라타 청동 기마상>을 원형으로 삼아 <콜레오니 기마상>을 제작했는데 모방이 아닌 재해석과 연구를 통해 도나텔로의 명성에 도전하고자 했다. <가타멜라타 청동 기마상>이 침착하고 명상적인 느낌의 조각으로서 다분히 고전주의적인 기마상이라면 <콜레오니 기마상>은 야성적이고 무서운 힘을 내재하고 있는 사실주의적인 조각으로서 많은 대조를 보인다. 그러나 공통점은 인체와 말에 대해서 해부학적으로 철저하게 연구하여 객관적 사실주의를 추진했다는 점이다. <콜레오니 기마상>의 말은 활기와 생동감이 넘치며 말 위의 콜레오니는 무엇인가를 위협하고 압도하려는 듯한 거만함과 당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극적인 형태의 베로키오 기마상은 도나텔로의 기마상과 함께 르네상스의 모범적인 조각으로 남게 되었으며 후세에 기마상의 전형으로서 큰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베로키오는 그의 대규모 조각 공방에서 조각 작품 <다비드>(1476년경)와 회화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 등 유명한 작품뿐 아니라 훌륭한 제자들도 다수 배출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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