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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조각사

이탈리아 피렌체 전성기 르네상스 조각(16C)

by _____seula 2023. 5. 18.

르네상스의 위대한 천재, 미켈란젤로

조각가, 화가, 건축가, 시인으로서 위대한 천재성을 갖춘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브라만테, 라파엘로, 지오르지오네, 티치아노 등과 함께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초인간적인 예술가였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단순히 예술품을 창조하는 장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문주의자들이었고 과학자였으며 철학가였다. 그들은 초기 르네상스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질서에서 벗어나 시각적인 효과 그 자체에 관심을 집중시키며 탁월한 기량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중 위대한 천재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인물이 바로 굴곡 많은 삶을 살았던 미켈란젤로(Buonarroti Michelangelo, 1475-1564)이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근처 카프레제에서 태어났고 13세 때 기를란다요의 공방에서 도제가 되면서 미술을 시작했다. 이듬해 도나텔로의 제자였던 베르토르도 지오바니에게 옮겨가 조각을 배우고 연구했는데, 이때 메디치 가의 로렌초에게 인정받아 그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와 교류하고 있던 인문주의자들과 문인들의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으며 철학적인 배경을 닦아나갔다. 예술 가운데 회화를 가장 고귀한 것으로 여겼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와 달리 미켈란젤로는 조각을 최고의 위치에 두려고 했던 진정한 조각가였다. 작품 세계의 주제를 '인간'으로 규정지었던 그는 초인간적인 제작 의욕을 바탕으로 생명력이 전혀 없는 단단한 돌에 살아 숨 쉬는 듯한 인간을 창조했다. 탁월한 재능에 의해 탄생한 미켈란젤로의 인간 조각들은 후반기에 이르러 내면 의식과 다양한 모습의 육체가 조화를 이루어 매너리즘과 바로크 미술을 예고했다. 

24세 때 미켈란젤로는 로마에 체류하면서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를 제작했는데 대단한 찬사를 받으며 젊은 나이에 유명한 조각가로 부상했다. 유일하게 서명한 작품으로 알려진 <피에타>는 조용한 기독교적 정서와 석조각의 섬세한 기술이 어우러져 고전적인 정취를 한껏 전해주고 있다. 인체의 미가 곧 정신의 표현이라는 신플라톤주의 이론에 근거하여 제작한 두 인물은 완벽한 해부학적 바탕 위에 제작되었으며 15세기 미술의 극치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전성기 르네상스 최초의 공공 기념물인 <다비드> 상이 태어나는데 미켈란젤로의 독자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그는 헬레니즘 조각에서 자신의 양식적인 요소를 찾았는데, 강한 심리 상태의 표출과 당당한 양감의 표현이다. <다비드> 상은 1501년 26세 때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위원회'의 위촉을 받아 제작에 착수하게 되었고 1504년에 완성했다. <다비드> 상의 재료인 대리석은 원래 피렌체의 조각가 두초가 50여 년 전 피렌체 대성당의 <예배자> 상을 만들려고 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우여곡절 끝에 미켈란젤로의 손에 들어오게 되어 <다비드> 상의 재료가 되었다. 보통 사람 키의 3배 가까이 되는 4m 높이의 <다비드> 상은 건강한 신체와 고전적 자세를 지닌 영웅적 면모를 보인다. 순간적으로 찡그린 표정 묘사와 손과 발 혈관의 세부적이고 사실적인 묘사에서 보이는 정신적 긴장감은 <다비드> 상에 고전적이고도 르네상스적인 생동감이 병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비드의 자세에는 다소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날카로운 눈매, 꼭 다문 입은 힘과 분노를 표현하고 있으며 왼손에 쥔 돌멩이를 거인 골리앗을 향해 막 던질 듯 보인다. 피렌체를 구하기 위한 저항과 독립의 상징으로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도나텔로나 베로키오의 <다비드> 상 발 밑에서 볼 수 있는 잘린 골리앗의 머리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에는 없는데 이것은 독창적으로 제작하려 했던 미켈란젤로의 의도로 보인다. 이 작품은 설치 장소 때문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미켈란젤로의 희망과 결정에 따라 베키오궁 앞 테라스에 설치되었다. 후에 피렌체 공화국 시민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애국의 상징, 도시의 수호신으로서 시청 앞에 세워지기도 했다. 현재 원작은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으며 똑같은 크기로 모각되어 광장에도 세워져 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은 야외 조각으로서 또는 주변과의 조화를 꾀한 환경 조각으로서도 첫발을 내디뎠다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조각을 건축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시켜 3차원의 표현을 이룩한 점은 조각사에 지대한 공헌이다.

 

 

메디치 가의 분묘, 로렌초와 줄리아노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피렌체에서 교황 레오 10세와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의 의뢰를 받아, 미켈란젤로는 1520~1536년에 걸쳐 메디치 가*를 위한 분묘를 세우게 된다. 먼저 예배당을 건축했고 나중에 분묘를 위한 조각을 분묘와 완벽한 조화가 되도록 웅대하게 계획했다. 그러나 완성된 조각상은 절반인 7개뿐 이어서 아쉬움을 남겼는데, 잦은 설계 변경과 재시공을 반복하며 미켈란젤로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공사가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메디치 가의 분묘는 산 로렌초 성당 안에 있다. 제단 정면의 좌·우 벽면에 묘비가 안치되어 있는데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로렌초(Lorenzo de Medici, Duke of Urbino)공과 줄리아노(Giuliano de Medici, Duke of Nemours) 공의 묘비로,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조각상이 있다. 각각의 조각상 밑에는 상당한 중량감과 입체감이 느껴지는 좌우 2개의 남녀 조각상이 삼각형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묘비상 사이에는 2m가 넘는 <성모자> 상이 놓여 있다. 두 사람의 공작상에는 각기 다른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로렌초 공의 조각상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그 아래에 오른쪽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새벽>을 나타내는 여성상이, 왼쪽에 인생의 지치고 후회스러운 황혼기인 <저녁>을 나타내는 남성상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줄리아노는 '행동하는 사람'으로 나타냈으며 그 아래 왼쪽에 휴식하는 <밤>을 상징하는 여성상이, 오른쪽에 활동하는 <낮>을 의미하는 남성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조각상들이 은유적인 주제를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특히 줄리아노 조각상 밑에 있는 <밤>과 <낮>의 조각상은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며 죽은 자를 고요하게 칭송하고 있다. 조각상이 있는 벽면의 기둥과 기둥 사이가 좁고 벽의 깊이가 얕아 그 안에 안치되어 있는 로렌초와 줄리아노의 조각상이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안정감 있고 차분한 형태로 시각적인 통일성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누워있는 나체의 조각상들은 힘차게 고개를 돌리고 있어 근육의 이완과 수축, 팽창의 긴장감을 엿볼 수 있는데, <다비드> 상에서 본 바 있는 고요하면서도 힘찬 움직임 즉, 응축된 내면의 심리 상태를 연상시킨다. 

줄리아노와 로렌초는 비교점이 많다. 줄리아노는 인간의 행동적 원리를 구현하는 밝은 이상화를 나타내고 있으나 로렌초는 인간의 존재와 관조적 원리를 구현하는 깊은 상념을 내포하고 있다. 줄리아노의 행동적인 이미지는 목과 얼굴의 시선 방향을 통해 읽을 수 있으며, 로렌초의 팔을 괴고 상념에 빠져 있는 포즈를 통해 생각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비정상적으로 뒤틀린 줄리아노의 목은 다소 어색하고 왜곡된 표현이며 로렌초의 자세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와 흡사하다.

메디치 가의 분묘에 있는 로렌초와 줄리아노의 조각상을 통해 당시 최고의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시대적 갈등과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를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인간성 회복이라는 르네상스 정신에 부합하고자 하는 당연한 정신적 행로였으리라 짐작된다.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이 깃든 수백 점에 달하는 데생과 조각 작품은 불굴의 제작 의욕과 함께 후세에 영원히 빛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메디치 가문; 300년 이상 플로렌스 지방을 통치하고 지배했던 은행가의 가문으로, 금전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특히 로렌초 공은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했는데 그 중 미켈란젤로는 특히 로렌초로부터 재정적 도움을 많이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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