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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조각사

바로크 미술 조각

by _____seula 2023. 5. 19.

바로크 시대의 베르니니와 성 베드로 대성당

17세기는 르네상스 때보다 두드러지게 개인주의적인 행동과 사고가 요구되었고, 조교 개혁의 정신적인 변화 속에서 미술 역시 새로운 미적 흐름을 갖게 되었다. 시민 사회가 성립되면서 상업의 발달이 이루어졌고 그에 따른 자본주의 형성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행동의 변화를 파악하고 수립하기 위해 열성과 노력을 기울인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7세기의 미술은 르네상스의 완벽한 개념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지와 경제력을 발판으로 커다란 힘을 가지게 된 왕국들과 로마 교회의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의식들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로마를 최고의 도시로 만들고자 대규모의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교황이 북이탈리아의 재능 있는 미술가들을 영입했는데, 이들이 창조해 낸 미술 양식을 후에 '바로크(Baroque)'라고 명명했다. 1600~1750년의 시기를 풍미했던 이 양식은 유럽의 여러 가톨릭 국가에 확대되었으며 에스파니아,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이 바로크 양식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바로크란 용어는 일반적으로 비뚤어진 모양을 가진 '기묘한 진주'라는 다소 왜곡되고 그로테스크한 뜻을 지니고 있다. 바로크는 16세기 르네상스 미술의 조화와 완벽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동적인 자세와 섬세한 양감 표현을 그 특색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귀족들의 미술이다 보니 화려한 의식을 과시하는 표면적인 장식에 치중한 것도 사실이다. 그 예로 인체 표현에 있어서는 남성 근육을 과장하는 데 열중하고 여성 누드는 부드러운 피부 질감과 관능적인 세부 묘사에 집착했다. 또한 바로크는 교회나 국가의 선전과 홍보의 목적에 이용되었는데, 베르사유의 루이 왕 궁전은 바로크 취향에 가장 근접한 표본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이처럼 17세기의 바로크는 괄목할 만한 다양성을 보여주면서 성장했고 18세기가 도래하면서 로코코 양식 속에서 명맥을 유지했는데, 영웅적인 주제나 기념적인 대리석 조각보다는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작고 아름다운 도자기로 된 인물상 등이 그 시대의 취향을 반영하면서 발달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는 계몽주의 사상과 프랑스혁명의 기운으로 전통이 붕괴되면서 대전환이 일어나는데, 이 시기에 프랑스는 바로크는 곡선 장식을 얕잡아보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이어서 등장한 19세기의 합리주의는 매너리즘, 바로크, 로코코 양식들이 예술을 타락시키고 쇠퇴시키는 모멸적인 양식이라고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인간의 정신적인 표현이 다양해짐에 따라 바로크는 폭넓은 시각으로 재평가받게 되었다. 즉, 바로크는 르네상스를 보다 확장시킨 개념이며 이질적이지만 독자성을 강조하는 발전적인 예술과정이라고 본 것이다. 본질적으로 바로크는 매너리즘의 인위적인 사실주의에 반발하고 역동적인 운동감을 표현해 내는 기법을 발달시켰다. 오늘날에는 좁은 의미의 미술 양식에서 벗어나 넓은 의미의 문화 양식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다른 시대와 장르에도 확대하여 적용되고 있다. 

바로크는 북유럽의 화가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와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3-1640) 그리고 조각가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와 같은 창시자들에 의해서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다방면에 재주가 있던 베르니니는 유럽의 바로크 중심지인 로마에서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었던 인물이다. 베르니니는 조각가였던 부친 피에트로를 도와 고대 작품들을 보수하는 일을 하면서 역량을 키워나갔다. 17세기 때 당대의 교황 바울 15세의 후원을 받으며 수많은 조각상과 공공장소의 동상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고대 미술과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 그리고 조각가 볼로냐의 영향을 받으며 자신의 위치를 확립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1629년 베르니니는 성 베드로 대성당(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설계자가 되었다. 교황의 권위와 로마 가톨릭의 통합을 과시하려는 교황청의 의도로 시작된 이 대성당은 가톨릭의 총본산이며 세계 최대의 성당이다. 1452년 교황 니콜라우스 2세가 착수했으며 브라만테의 계획에 따라 신축 공사가 시작되었고 그 후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베르니니를 포함한 여러 명의 대표적 건축가들에 의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대성당은 베르니니의 열정적인 숨결과 능력을 곳곳에 지니고 있다. 그는 다양한 기법과 재료를 사용하여 성전 내부에 여러 개의 조각 작품과 제단을 제작했고 외부의 성전 광장을 완성했다.

베르니니는 1624년에 먼저 성당 내부 중앙의 돔 밑에 있는 중앙 제단 설계부터 시작했다. 꼬이며 올라가는 거무스름한 청동 기둥은 주위의 거대한 흰 대리석 기둥과 극적인 대비를 이루고 있고 이 4개의 기둥을 연결하고 있는 틀 장식 위에는 다양한 크기의 천사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동적인 표현력으로 공간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이 제단은 건축과 조각을 융합시킨 우수작으로 평가된다. 

1655년 이후 그는 또 하나의 내부 작품인 <성 베드로의 옥좌>를 제작했는데, 중앙 제단 뒤의 벽 조각으로서 5m가 넘는 네 박사의 형상이 청동으로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웅대함과 생동감을 가득 담고 있는 연극적인 건축 조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1656년 대성당 외부의 광장 건축에 착수하여 1667년에 완성했다.

로마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들르는 곳 중의 하나인 성당의 정면 광장 가운데는 고대 이집트 제12왕조의 <오벨리스크>가 있으며 수백 개의 기둥들이 타원형으로 늘어서 있다. 이 기둥들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전체적인 모습을 대단히 웅장하고 구조적으로 보이게 한다. 베르니니의 장대한 타원형의 대광장은 2백 년 동안 증축되어 온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물들을 일관성 있게 결합하고 있으며 웅장한 내부 장식과 함께 일체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이처럼 엄숙하고 정연한 감동을 주고 있는 베르니니의 조각과 건축은 종교 예술의 전형을 창조해냄으로써 베르니니를 미켈란젤로에 견줄만한 천재 조각가로 인정받게 했다.

 

 

바로크 최고의 조각, 성 테레지아의 법열

베르니니는 조각가였던 아버지 피에트로의 지도 아래 석조기술을 연마하면서 탁월한 기교를 지닌 바로크 시대 최대의 거장으로 성장했다. 베르니니 초기 작품의 하나인 <아폴론과 다프네>는 전형적인 바로크적 경향의 작품으로, 동적인 구성과 복잡하고 드라마틱한 형태 그리고 능숙한 기교 등을 드러냄으로써 17세기 예술의 특색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17세기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의 절정을 이루어낸 베르니니는 조각, 건축, 회화 그리고 무대 장식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조각에서 여러 가지 재료들을 조화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회화에서는 색채를, 그리고 건축에서는 구성적인 면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점차 조각 속에 색채와 구성을 종합시키는 작품 세계를 이루어냈는데,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로마 산타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의 코로나로 예배당 중앙에 있는 <성 테레지아의 법열>이다. 이 작품은 바로크 조각 중 가장 찬사를 받는 베르니니의 업적이며 베르니니 자신의 종교적인 믿음이 반영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성 테레지아의 법열>은 위대한 성녀였던 테레지아의 꿈속 경험을 묘사한 것으로, 절대자의 사랑이라는 정신적인 체험을 순수하고 신비로운 느낌으로 표현했다. 작품에서 성 테레지아는 힘을 잃어 손과 발이 축 늘어져 있고 눈은 반쯤 감긴 상태이며 입은 약간 벌어지고 머리는 뒤로 젖혀져 있다. 깨끗하고 매끄럽게 다듬어진 피부는 깊게 파이고 접힌 옷주름에 감겨 있다. 옷주름의 표현은 단단한 대리석으로 조각된 것이 아니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사실적이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닌 작은 천사가 손에 들고 있는 사랑의 화살은 성녀의 가슴에서 막 뽑혀 성녀의 정신적인 고통을 극대화시키는 듯하다. 성녀와 천사는 마치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은 모습인데 빛의 한가운데 있는 상황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테레지아를 비추고 있는 금빛 광선은 황홀경에 빠져 있는 테레지아의 모습을 더욱 실감 나게 한다. 이처럼 빛의 효과를 이용한 표현 방법은 회화에 많이 이용되는 것인데 베르니니는 조각에 적용시켜 표현을 극대화했다. 이 작품은 내적인 체험을 생생하고 설득력 있게 시각화하여 코로나로 예배당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즉 기도와 믿음을 통한 이승에서의 영적 체험의 가능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에는 연극적인 효과가 형성되어 상당히 진한 호소력을 지닌다. 코로나로 예배당은 이 작품을 위한 무대 역할을 하는데, 주인공은 성 테레지아이며 조명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황금빛이고 관객은 코로나로 가문 사람들을 조각한 조상이다. 이 같은 구성은 베르니니의 연극에 대한 정열적인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테레지아 성녀와 천사는 하얀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있고 예배당 내부는 채색된 대리석과 화려한 금박으로 장식되어 조각품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대조적인 색채는 공간의 공허함을 한층 증대시키고 있다. 이처럼 베르니니는 회화의 표현에서나 가능한 환상주의를 조각에 반영한 뛰어난 기교의 소유자였다. 그만큼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쳤고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파리로 초대하여 자신의 흉상을 제작하게 할 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

베르니니는 나보나 광장에 있는 분수 조각 <4대 강의 원천>을 제작해 로마 시대 분수 조각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그 밖에도 <아이네아이스와 안키세스>, <다비드> 상, <아폴론과 다프네> 등 탁월한 조각이 많이 남아있다.

 

 

프랑스의 바로크, 베르사유 궁전 조각

17세기 말 루이 14세의 통치 기간인 1643~1715년 동안 프랑스는 유럽의 궁정 문화를 변화시키면서 세계적인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프랑스 미술은 절대 권력자인 루이 14세의 영광을 찬미하려는 목적이 있었으며 건축가와 조각가들은 베르사유 궁전을 통해 새로이 고전 시대를 열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있었다. 이에 따라 루이 14세의 양식으로 불리는 '바로크적 고전주의'가 나타났다. 이것은 고전주의와 이탈리아 바로크를 결합한 것으로 스토아 철학과 휴머니즘적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루이 14세의 예술은 그의 권력 유지와 과시에 봉사하도록 조직되었다. 그리하여 권력의 집중이라는 명목하에 파리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교외의 늪지대를 메워 화려하다 못해 사치스러운 궁전을 짓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베르사유 궁전으로, 인공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베르사유 궁전은 1661년 망사르 르 블랑을 지도자로 발탁하여 개축에 착수했으며 1669년에 르보에 의해 확장 공사가 시작되었고 다시 쥘르 아르두앵 망사르가 맡아 대규모로 확대했다. 20여 년에 걸친 공사로 거울의 방, 전쟁의 방, 평화의 방 등이 만들어졌고 특히 정원 쪽 전면은 막대한 길이로 설계되었다. 100만 평에 달하는 기하학적 구성의 정원과 아름다운 수로 그리고 사각형, 원추형 등으로 다듬은 수목이 어우러진 베르사유 궁전은 그 규모에 걸맞은 조각품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규모의 조각 장식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여기에 참여한 조각가는 지라르동(Francois Girardon, 1628-1715)이었다. 지라르동은 균형 잡힌 구성과 고전적인 엄격함으로 프랑스 고전주의 조각의 대표적 존재로 불리며 베르사유 궁전 취향에 어울리는 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작품 <요정들에게 둘러싸인 아폴론>은 엄격한 좌우 대칭의 인물 군상으로서 그리스 헬레니즘기 피디아스의 영향을 받은 고전적인 작품이다. 그 밖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을 모방한 <루이 14세 기마상> 원형은 고전적인 의상을 걸친 고요한 왕의 모습을 창조해 냈고 파리 소르본 대학의 <리슬류의 모>도 고전적인 요소와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또 한 사람의 위대한 바로크 작가는 퓌제(Pierre Puget, 1620-1694)이다. 그는 베르니니의 영향을 받아 힘찬 작품을 보여주었는데 지나치게 개성적이고 강렬하여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별로 환영받지 못했지만 후에 '프로방스의 미켈란젤로'라고 불리며 부각되었다. 그가 진정한 바로크적 경향의 대표자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베르사유 궁전을 위해 <크로토나의 밀로>와 <안드로메다를 구하는 페르세우스>를 조각한 52세 때이다. <크로토나의 밀로>는 나뭇가지에 걸려 사자에게 잡아먹힐 뻔한 전설적인 레슬러를 표현한 것이다. 맹수에게 공격당하고 있는 희생자는 격렬한 움직임으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데 팽팽한 긴장감과 함축적인 구도가 인물의 절망감을 더욱 증대시키고 있다.

베르사유 궁전 조각에 참여했던 조각가들 중 후기에 두각을 나타냈던 사람은 코와즈보(Antoine Coysevox, 1640-1720)이다. 그는 루이 14세의 궁정 수석 조각가로서 초상 조각에서 묘비상까지 조각의 전 영역에 손을 뻗쳤던 인물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전쟁의 방'에 있는 <루이 14세 기마상>은 그의 유명한 작품이다. 둥근 타원형 안에 조각된 이 부조는 말을 탄 루이 14세가 쓰러진 적 위를 돌고 있는 모습으로, 그 움직임은 전형적인 바로크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코와즈보는 특히 초상 조각에 뛰어난 역량을 과시했는데 <콘테 공 흉상>, <콜베르 흉상>, <르 브랑 흉상> 등을 통해 생생한 리얼리즘과 성격 묘사의 예리함을 보여주었다. 가족, 친구, 자신의 흉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흉상을 통해 바로크적인 화려함을 드러냈던 코와즈보는 명실공히 프랑스 초상 조각의 일인자로서 명성을 누렸다. 프랑스의 왕과 사회 저명인사들은 자신들의 기마상과 묘비가 훌륭한 궁정 조각가들에 의해 만들어지기를 원했는데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 코와즈보는 <루이 14세 흉상>과 파리 학사원에 있는 <마자랑의 묘>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베르사유 궁전을 장식한 조각가로는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과 튜비(Jean-Baptiste Tuby, 1635-1700) 등이 있으며, 튜비의 궁전 연못 조각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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