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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조각사

근대 조각 부르델과 마이욜

by _____seula 2023. 5. 20.

구조의 본질 탐구, 부르델

로댕을 정점으로 하는 근대 조각을 두 기둥은 부르델과 마이율이다. 부르델(Emile Antonie Bourdelle, 1861-1929)은 정력적이고 힘 있는 조각으로 로댕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감하게 로댕의 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개척했다. 부르델은 로댕의 아틀리에에서 조수로 1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을 같이 지냈다. 그는 스승 로댕에게서 모델링을 배우며 구상적인 측면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그는 로댕과 전혀 다른 형식인 고대 아르카익적 미에 관심을 쏟았다. 원시적인 씩씩함과 로마네스크의 중후함을 선호했으며 전통적인 아카데미즘이 아닌 힘찬 형태의 구축적인 기념비적 요소를 포함시켰다. 부르델은 그 자신의 예술적 지향점인 구조의 본질을 위해 탄탄한 짜임새와 구축적인 형태를 수용하면서 전 작품에 걸쳐 건축적인 균형감이 드러나도록 했다. 또한 설명적인 세부 묘사는 전체의 형상 속에 흡수되도록 하여 사실성과 이상성의 조화를 보여주었다. 

부르델은 어린 시절 부친을 도와 가구 세공을 했는데, 이는 그가 조각가로서의 성장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초기 활동기에 제작된 <몽토방 전몰자 기념비>와 <베토벤 마스크>는 자유로운 형태나 모델링 처리에 있어 로댕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웅장하고 서사적인 성격은 부르델 고유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1901년 <아폴론의 두상>을 통해 종합적인 형태의 통일을 지향하게 되면서 자기 자신의 양식을 찾아내는 예술적인 성숙기를 맞이한다.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나이 51세가 되어서인데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가 1909년 국립미술협회전에서 호평을 받아 이름이 크게 부각되었다.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헤라클레스가 괴조를 향해 막 화살을 쏘려는 순간을 포착한 것으로 응축된 힘을 보여주고 있다. 바위에 발을 붙인 채 뒤로 몸을 젖히고 있는 긴장된 자세지만 뛰어난 균형 감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역동감 넘치는 동작에서 비롯된 팽팽한 근육은 용맹한 남성의 이미지를 잘 나타낸다. 또한 두 다리와 바위 사이의 공간, 팔과 활 사이의 공간은 이 작품에서 중요한 시각적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간략하면서도 대담한 헤라클레스 상은 부르델에 커다란 공간을 지배할 수 있는 조각가로 성장하는 데 발판이 되었다.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 이후 부르델은 <미키에비치 기념비>, <샹젤리제 극장 정면 부조>, <알베아르 장군 기마상> 등 웅대한 공간 구축물을 제작하게 된다. 스승과 제자였던 로댕과 부르델의 발자취는 확고한 영향력으로 뿌리내렸다. 로댕의 역동적인 동세와 표현주의적 방향은 현대에 이어져 구상적인 경향을 취하고 있다. 반면 부르델의 건축적 표현 양식과 전체 속에 통합하는 구축법, 그리고 순수한 형태의 완성은 오늘날 추상적 흐름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건축하는 조각'의 첫발을 내디딘 부르델의 찬란한 업적은 그의 1000여 점에 이르는 작품과 더불어 빛나고 있다.

 

 

지중해의 향기, 마이욜

로댕의 감성적이고 인상주의적인 양식의 영향 아래 있었던 많은 조각가들은 한편으로는 로댕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절망적인 주제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던 조각가 중에 로댕의 후계자였던 부르델은 자신의 조각에 건축적이고 기념비적인 요소를 담아 그와 구별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 마이욜(Aristide Maillol, 1861-1944)은 고전적인 이상주의로 회귀하여 유연한 형태미를 되살리며 로댕과 차별화했다. 로댕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마이욜은 상징파 화가로 출발했다. 그 후 마이욜은 친구의 소개로 화가 고갱을 만나 많은 영향을 받았고 고갱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나비파*에 합류하면서 폭넓은 예술을 경험하게 된다. 이 시기에 유행했던 태피스트리**에 강한 감명을 받아 흥미를 가지고 활동했으나 정밀한 작업에 몰두하다 보니 시력이 나빠져 태피스트리 작업에 전념하지 못하고 조각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40세 때의 일이다.

1896년 <선>이라는 목조와 1900년 <서 있는 욕녀> 등을 발표했는데 고갱이 끼친 흑인 예술의 영향을 분명히 읽을 수 있다. 1902년 최초의 개인전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것에 힘입어 마이욜은 조각에만 정진하게 된다. 1908년 마이욜은 그리스를 방문하여 올림피아의 조각과 아르카익의 단순하고 소박한 조형성에 감동을 받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초기 그리스 조각의 새로운 계승자가 된다. 부르델이 아르카이즘을 선호했듯이 마이욜 또한 고대 그리스 예술에 찬사를 보내게 되었다. 이러한 감성적 배경 속에서 마이욜은 로댕의 빛과 그늘에 의한 살붙임에서 벗어나 인체의 매끄러운 표면과 풍성한 볼륨을 살린 형태를 만들어냈다. 마이욜 작품의 모든 주제는 젊은 여인의 육체로, 마이욜이 표현한 여인들은 지극히 평온하며 밝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그의 작품은 종교적인 것에서 벗어나 있으며 삶의 고통과 고뇌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대신 인체의 아름다운 포즈와 건강미를 담고자 했으며 항상 기쁨과 즐거움이 깃든 표현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같은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대표작 <지중해>로, 1905년 살롱 도톤느에 출품되어 마이욜에게 첫 성공을 안겨 주었다. 이후 그의 작품들은 거의 <지중해>의 연장선상에 놓이게 된다. <지중해>는 풍부한 양감, 표면과 선의 단순한 아름다움, 조화롭고 조용한 구성 등을 지닌 걸작으로서 지극히 아르카익적인 면모를 풍긴다. 또한 견고한 형태는 중후한 기품을 보여주고 명확한 볼륨은 육감적인 균형미를 느끼게 해준다. 

마이욜 조각의 가장 현저한 특성은 그리스적 형식과 질서에 의한 균형잡힌 구성과 정적인 조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지중해>뿐만 아니라 <일 드 프랑스>, <강>, <대지>, <밤>, <플로라> 등의 작품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마이욜의 모든 작품은 생명력이 넘치는 형태와 볼륨을 자연의 편안함과 풍요로움에 접목시켜 자연과 대립이 아닌 융합을 도모했다는 또 하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술의 목적은 조화이며 조화는 우주의 근원이자 보편적인 영원의 진리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자신이 태어났던 고향에서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하기 전까지 그가 매달렸던 <조화>라는 작품은 비록 작가의 죽음과 함께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지만 마이욜의 예술적 신념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나비파(Les Nabis); 1888년 파리에서 결성되어 아카데미즘이나 인상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학을 실천하려고 모인 작가들의 그룹이다. 고갱의 미술 이념과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신비적, 상징적 경향의 화풍을 구사했으며 일본 풍속화의 영향을 받았다.

 

**태피스트리(Tapistry); 다양한 색깔의 실로 무늬를 짜 넣은 실내장식물로 주로 벽걸이로 이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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