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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조각사

근대 조각 로댕

by _____seula 2023. 5. 20.

근대의 시작, 로댕의 청동시대

서양 조각의 역사는 그리스의 피디아스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 그리고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을 큰 줄기로 한다. 조각이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19세기 후반에 로댕이 등장하여 새로운 조각을 전개시켰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로댕은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저속한 아카데미즘과 상투적인 고전주의를 버리고 새로운 조각을 개척해 나갔다. 회화에서는 많은 이들의 손에 의해서 이룩된 예술의 혁명을, 조각에서는 로댕 홀로 이루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덕분에 그의 제자와 후배들인 부르델, 데스피오, 마이욜, 브랑쿠시 등은 로댕의 열정적인 성과에 힘입어 독자적인 길을 닦아나갈 수 있었다.

로댕이 18세기 이후 조각의 진부함에서 벗어나 창조의 완성에 이를 수 있었던 근원은 로마네스크와 고딕 그리고 미켈란젤로였다. 더불어 동시대 문호인 빅토르 위고와 보들레르의 영향 또한 지대했고 무엇보다 그 자신의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이 내면의 깊고 힘찬 생명력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로댕은 인간의 정신적인 깊이를 예리한 사실주의로 나타냈으며, 모델들의 순간적인 움직임을 관찰하여 생동감 있는 현실 자체의 인간들을 조각했다. 또한 로댕은 조각이 건축의 장식물이나 부속물의 위치에서 벗어나 독립된 예술로 존재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더욱 의미를 둔 부분은 작품의 전체적인 형태와 표면 처리에 있어서 그 당시 만연했던 부드럽고 매끄럽게 다듬어진 형태와 피부의 표현을 버리고 인체에서 우러나오는 순간적이고 인상적인 형태를 흙의 질감과 손맛을 살려 표현했다는 점이다. 작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흔적과 주조 과정에서 나타나는 붙임선 등을 인위적으로 다듬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조각에 있어서 주관성과 자율성을 중요하게 인식시켰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근대 조각의 역사에서 로댕의 위치는 크고 빛나는 것이며 주저 없이 그를 선구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로댕은 젊은 시절 파리에 있는 에꼴 데 보자르에 지원했으나 세 번이나 낙방하여 장식미술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1864년 가난하고 고독했던 수업 시기에 만든 <코가 찌그러진 남자>는 당시 예술가들의 등용문이었던 살롱에 출품하여 거부당하기도 했다. 그 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미켈란젤로와 도나텔로의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아 연구하기 시작했다. 

1870년대 보불전쟁에서 프랑스의 패배로 많은 예술가들이 해외로 나갔는데 로댕은 벨기에의 브뤼셀에 거주하며 새로운 제작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것은 인체 입상에 대한 구상이었는데, 군대 장교였던 친구의 도움으로 골격과 근육이 잘 발달된 부하를 모델로 소개받아 1875년부터 <청동 시대> 제작에 몰두하게 된다. <청동 시대>는 플로렌스와 로마를 여행하면서 접했던 르네상스 청동 조각상들을 연상시킨다. 처음 제목이 <자연에 눈떠가는 사나이>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최초로 생명을 얻은 인간이 대지에서 일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이 청년의 신체를 통해 자연 속에서 생동하는, 순수하고 강한 생명력을 지닌 이상적인 인간을 구현해보려고 했다. 2년 후인 1877년 완성하여 브뤼셀 전람회와 파리 살롱에 출품했으나 실제 인물의 원형을 떠낸 것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전시에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거부당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청동 시대>가 아카데믹하고 관습적인 살롱이 원하는 주제에서 벗어나 인체에 대한 가치와 형식을 진실되게 구현하고 새롭게 창조하여 19세기의 제도화된 미의식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청동 시대>의 표면에서 느껴지는 살아 있는 듯한 질감과 완벽한 구조의 통일은 그 당시의 신화적인 주제와 특징 없는 의상으로 감싸였던 아카데믹한 조각의 타성을 무너뜨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처럼 <청동 시대>는 작가의 감정 이입의 가능성과 완벽한 사실주의적 자세를 보여주어 19세기의 형식적인 예술 흐름에 대항했다. 

 

 

인간의 비극, 로댕의 지옥의 문

1880년 신축될 파리 장식미술관 입구로 사용하기 위해 정부의 의뢰를 받아 착수한 <지옥의 문>은 186여 명의 많은 인물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작품이다. 4년 후 1차 완성을 보았고 그 후 다시 오랜 기간 재작업을 진행했으나 결국 미술관 건립 계획이 취소되고 말았다. 그리고 의뢰받은 지 20년의 세월이 지난 1900년 석고로 제작된 <지옥의 문>이 공개되었다. 

<지옥의 문>의 주제는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에서 따온 것으로, 죄를 짓고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과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인을 형상화했다. 로댕이 채택한 형식의 모델은 초기에는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으로, 각각의 장면들을 구획 지어 배열하는 방법이었다. 그 후 상당히 변화되어 팀파늄과 양쪽으로 문을 나누는 구조를 취하고, 양쪽의 문은 구획으로 나누지 않고 전체적인 구성법을 적용했다. 따라서 <지옥의 문>은 수평 장식의 코니스와 바로  아래 팀파늄, 그 아래 두 짝의 문과 양옆으로 기둥 격인 필라스터가 있는 구성이다. 맨 위 코니스 위에 <세 망령>이, 팀파늄 중앙에는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양쪽 문짝은 세속적인 삶의 욕망 때문에 지옥으로 떨어진 인물들이 비참하고 격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지옥의 문>은 로댕이 사망하던 1917년까지도 완성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하는 사람>, <입맞춤>, <세 망령> 등과 같은 몇몇 독립상들의 강렬한 표현이 조화를 이루어 이 문의 장대함을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독립상들 중 대중에게 가장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은 시인이나 창조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약 70cm밖에 되지 않는 작은 조각상이지만 후에 200cm에 달하는 크기로 확대되었다. 1888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시인>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었고 1904년 런던 국제협회에 전시되었으며, 1906년에는 대형의 <생각하는 사람>이 파리의 판테온 앞에 전시되어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의 문> 상단에 앉아서 처참한 전경을 내려다보며 인간 실존에 대해 고뇌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육신은 고뇌하는 사람답지 않게 강건하고 활력 있게 표현되었는데, 이 점은 지적인 면과 육체적인 힘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조화로운 인간을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한편 <입맞춤>은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운명적인 연인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이야기를 도입한 것으로, 이 연인들은 12세기 이탈리아에 실존했던 인물들이라고 한다. <입맞춤>은 불안한 정적이 흐르는 관능성 짙은 작품으로서 사랑의 기쁨과 갈망을 아름답고 열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보기에 다소 민망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 노골적인 작품은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서 포르노 작품으로 취급당하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엄숙하면서도 애정이 넘치는 이 작품은 마이욜의 <욕망>과 브랑쿠시의 <키스> 등에 영향을 미쳤다. 로댕의 <입맞춤>은 그 유명세 때문에 320여 점이 복제되었으며 전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조각 중 하나가 되었다. 또 하나의 독립상 <세 망령>은 똑같은 형상의 아담을 세 번 반복해 설치한 것으로, 단순한 결합의 구성 방법을 통해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켰다.

이처럼 <지옥의 문>은 인간의 비극을 서술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삶 속에 내재되어 있는 욕망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황폐의 미는 완성된 미보다 아름답다."라고 한 그의 조형적 신념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로댕이 위대한 이유는 19세기 조각을 이루고 있던 모든 규범들을 내던지고 내적인 진실과 충만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조각적 가치 판단의 변혁을 이루어 20세기 조각의 이정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로댕이 죽기 1년 전인 1916년 국가에 그의 작품을 기능했는데, 사후 그의 작업실 겸 주거지였던 곳이 로댕 박물관으로 지정되어 많은 미술가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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