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표현주의의 대표적 조각가 바를라흐
두 번에 걸친 세계 대전으로 인한 급격한 변혁과 대립은 20세기 미술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인간적인 자유를 강조하고 개성을 존중하는 분위기 속에서 조형의 자율성과 예술의 순수화를 지향하는 특징이 나타낫고, 이와 같은 특징들은 20세기 전반기 미술에 잇어서 여러 가지 양식의 난립을 부추긴 원인으로 작용했다.
20세기의 다양한 현상 중에서 특히 기계 문명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은 미술 세계에 입체주의, 미래주의, 구성주의, 키네틱 아트 등이 발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 기계 문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의 반영도 있었는데 표현주의, 다다, 초현실주의 등이 그 흐름에 있었다. 이러한 양식들 중에서 표현주의는 자연주의, 아카데미즘, 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독일에서 일어난 예술 운동이다.
표현주의는 자연의 모방보다는 내적인 감성의 발산에 그 의미를 두었으며 아울러 원시적이고 주관적이며 초월적인 것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현대 미술의 역사에 뚜렷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독일의 표현주의 조각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쯤 절정에 달했는데, 1905년 다리파*와 1911년 청기사 그룹**이 주축이 되어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 그룹들은 고갱, 뭉크, 고흐 등의 영향을 받고 고딕적인 목조와 흑인 조각 등을 재평가하면서 주관적인 사실성을 구축해나갔다. 독일 표현주의 조각의 성격은 시기적으로 19세기 말 비스마르크의 급진적 공업 정책으로 인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반영하고 있다. 즉, 불안과 빈곤, 퇴폐라는 비참한 사회 상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표현주의 작품 속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반응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전쟁이라는 충격적인 환경에 놓인 인간의 내면의식과 심리상태에 초점을 맞춘 조각들이 제작되었다. 조각가들은 불안한 사회 속에서 고통받는 노동자들이나 하층민들의 일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바를라흐(Ernst Barlach, 1970-1938)를 비롯하여 베크만(Max Beckmann, 1884-1950), 헤켈(Erich Heckel, 1883-1970), 케터 콜비츠(Kathe Kollwitz, 1867-1945), 렘브루크(Wilhelm Lehmbruck, 1881-1919), 민느(George Minne, 1866-1941) 등이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이들 중에서 시인이며 판화가이기도 한 바를라흐는 독일 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조각가로서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독특하게 표현해냈다. 바를라흐는 1895~1896년 동안 파리에 체류했고 1906년에는 러시아를 여행했는데, 이 시기는 그의 작품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에서 근대 공업 시대 이전의 원초적인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고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바를라흐 작품의 주제는 발틱 해 가까이에 사는 원시적 인간미를 갖춘 하층 농민들이었으며, 그들을 통해 인간의 순박함과 그 순박함 속에 녹아 있는 삶에 대한 인내를 끄집어내었다. 또한 그들의 불안정하고 고단한 삶을 느끼면서 이 세상에 희망을 전달할 수 있는 예술을 창조하고자 했다. 바를라흐는 목조, 청동, 세라믹 조각뿐만 아니라 목판화와 석판화에도 뛰어난 기량을 보였으나 주로 깎아서 만드는 목조각을 즐겨 사용했다. 한편 바를라흐는 중세의 옷을 입은 종교적 인물 조각상들을 통해 예술적 감동과 영감을 받았는데, 이때부터 누드가 완전한 정신성을 표현하기에는 미흡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의상을 걸친 농부들이나 도시 사람들의 이미지를 가지고 인간 정신의 진실함을 밝히기 위해 애썼다. 예를 들어 <복수자>는 단순하고 고풍적인 의상을 걸친 농부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서 명료한 형체의 덩어리와 일관된 질감을 전달해주고 있다.
1907년 제작한 <러시아 여자거지 2>는 간결하고 단순한 형태의 좌상으로서 당시 도시 빈민들의 상황을 짐작하게 해주는 리얼리티를 풍기고 있다. 이 외에 1927년에 제작된 <귀스트로프의 천사>는 전몰 용사들을 위한 기념비로서 바를라흐의 최초의 기념비 조각이다. 이 작품은 쇠줄에 매달려 수평을 유지하고 있어서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하다. 바를라흐는 자신이 다녔던 성당에 이 작품을 기능했는데, 바를라흐의 장례식 때 사람들은 이 작품을 관 위에 매달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바를라흐는 고딕적 형태나 중세의 이미지를 분명히 선호하고 있으나 근본적으로 표현주의적 경향이 넘치는 조각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에게 있어 조각은 가장 근원적인 인간의 삶과 인간의 모습을 다루는 것이었으며 그에게는 오직 인간적인 모습만이 의미가 있었다.
고뇌와 슬픔의 독일 표현주의 조각가 렘브루크
짧은 생애를 살았던 렘브루크(Wilhelm Lehmbruck, 1881-1919)는 누드가 최고의 표현 수단이라고 믿었던 조각가였다. 렘브루크는 로댕과 뫼니에, 민느 등의 영향을 받으며 조용하고 기품 있는 선의 리듬을 가지고 전쟁의 불안과 고뇌를 작품화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해에 그는 작가로서 인정을 받는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지만 삶에 대한 불안과 우수 때문에 38세의 젊은 나이에 베를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작품에 보이는 남자는 육체적, 정신적 허약함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늘고 길게 늘인 사지의 표현은 비극적인 요소를 풍기며 고뇌에 찬 얼굴 표정과 함께 깊은 정신성을 나타내고 있다.
렘브루크 작품의 특징은 이질적인 인체의 세부 표현과 특이한 자세 및 길게 늘인 형태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형식적인 면은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신비함과 고요함의 원인이 되고 있다. 독일 근대 조각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렘브루크는 1910~1914년 파리 체재 중 모딜리아니, 브랑쿠시, 아키펭코와 접촉했다. 마이욜의 영향을 받았으나 마이욜의 감각적인 육체를 따르지 않고 강한 정신성을 느끼게 하는 인체상을 창안했다. 렘브루크는 조각의 조형 원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비례라고 생각했고 새로운 시각으로 인체를 강조하기 위해 비례를 기괴하게 늘였다. 또한 렘브루크는 조각의 형태와 볼륨보다는 표면과 윤곽에 보다 집착했다. 그의 견고한 표면과 단순한 윤곽은 변화가 적어 밋밋하게 보이지만 고요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1913년 제작된 <서 있는 청년>은 인간의 이미지를 표현주의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고정된 자세는 운명을 버티는 인간을 제시하고 있으며 근대라는 시대적 상황에 대해 불편한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고딕적인 신체는 로댕이 지니고 있던 표현력의 반영이며 형신적인 단순화와 균형 감각은 마이욜의 표현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렘브루크만의 독특한 우수와 신비를 띠고 있다.
렘브루크의 대표 작품 <쓰러진 남자>는 제1차 세계대전에 놓인 유럽 젊은이의 운명을 상징하고 있다. 엎드려 고개를 숙이고 비탄에 젖은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 조각은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과 고뇌에 찬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담고 있다. 또 다른 그의 대표작 <앉아 있는 청년> 역시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며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젊은이를 표현한 것으로서, 우울과 고독 그리고 슬픔을 단순한 형식으로 처리했다. 이러한 작품들 모두 정서적인 긴장감과 민감한 사회의식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으로서 렘브루크는 자신의 조각에 나타난 조용한 인물을 통해 안정과 고요를 느끼고 고통의 감정에 대해 깊이 사고할 수 있게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다리파; 1905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결성되었고 창립자는 키르히너, 헤켈, 로틀루프였으며 독일 표현주의의 선두 역할을 했다. 주로 사회 비판적 의식과 인간에게 내재한 불안 그리고 열정을 원색과 주관적 변형을 통해 작품으로 분출시켰다.
**청기사 그룹; 칸딘스키를 중심으로 독일의 표현주의 작가들이 1911년 뮌헨에서 창설했다. 내적인 필연성에 기인된 표현을 중시하여 형태보다는 색채를 통해 상징성을 부각시켰다.
'서양미술사 > 조각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상조각 브랑쿠시 (0) | 2023.05.29 |
---|---|
20세기로 가는 전환기 조각 (0) | 2023.05.24 |
근대 조각 부르델과 마이욜 (0) | 2023.05.20 |
근대 조각 로댕 (0) | 2023.05.20 |
사실주의 미술 조각 (0) | 2023.05.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