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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조각사

20세기로 가는 전환기 조각

by _____seula 2023. 5. 24.

화가의 조각, 드가의 무희

20세기 초 예술에서 새로운 양식의 등장은, 지나간 시대의 예술관에서 벗어나려는 예술가들의 변화의 욕구와 시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조각은 르네상스 이후 거의 3세기에 걸친 침체기를 겪고 나서야 로댕이라는 위대한 작가에 의해 조형 예술로서의 자율성과 표현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걸쳐 조각의 영역은 번영을 되찾게 되었으며 로댕 이후 다양성을 시도한 그의 제자들과 주변의 조각가들은 새로운 조각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었다. 20세기 초, 조각의 이성적인 접근에 따른 결과로 3차원적인 조각적 특성에서 벗어나 시간성과 공간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채색뿐만 아니라 산업화의 결과물인 오브제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20세기 조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새로운 장을 펼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근대 예술의 여명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현상이 나타난다. 화가와 조각사 사이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많은 화가들이 조각 작품을 제작한 것이다. 현실을 정밀하게 재현하던 사실주의 예술관이 쇠퇴하면서 새롭게 회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는데, 회화라는 표현 수단만으로는 그 돌파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화가들의 조각 작품은 역사적으로 두 가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첫째는 사실주의 또는 인상파에 속하는 화가들 작품으로서 도미에, 드가, 르누아르 등이 있는데 이들은 회화에서 추구하던 것의 연장선상으로 조각을 선택했다. 둘째는 포비즘(야수파), 큐비즘(입체파) 화가들 작품으로서 회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조형을 추구했으며 마티스, 피카소, 브라크 등이 이에 속한다. 한편 양자의 중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다수의 화가들이 있는데 고갱, 모로, 마이욜 등 상징파 화가들이 바로 그들이다. 화가면서 조각가였던 많은 이들 중 인상파에 속했으며 만년에 시력이 약해진 이유로 조각을 시작했던 드가(Edgar Degas, 1834-1917)가 있다. 자연주의적 입장과 풍부한 표현력으로 20세기 조각의 형성에 기여한 드가는 회화적 표현에서는 이루어낼 수 없었던 부분을 해결해 보고자 부수적인 방법으로 조각을 선택했다. 그러나 후기에는 전적으로 조각에 전념할 목적으로 유화와 파스텔화를 차례로 포기하기도 했다. 드가 생전의 조각 작품은 그가 죽은 후 4년이 지나서야 작업실에서 발견되었고 청동으로 주조되어 1921년에 공개 전시되었다. 드가의 조각은 로댕의 직접적인 영향이 있었으나 오히려 로댕과 대등하게 평가되고 있다. 또한 그는 부단한 연구와 실험을 통해 점진적으로 자신의 조각적 능력을 드러냈던 화가였다. 

1881년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했던 혁신적인 작품 <14세의 무희>는 특이하게도 왁스로 된 몸에 채색을 한 것이다. 또한 기성 제품의 옷과 신발을 이용했는데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는 대담성을 보여주었다. 이 점은 당시의 조각 기법과 재료의 사용에 비춰볼 때 상당히 진보적이다. 그 후 드가는 다양한 자세의 작은 누드 조각상을 꾸준히 제작했는데, 1893년부터 1900년 사이에 만들어진 여러 가지 포즈의 춤추는 소녀 시리즈는 37점이나 된다. <무희>도 그 가운데 하나로, 번쩍 발을 들고 한 손은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해 아래쪽을 향하도록 했고 다른 한 손은 가운데로 뻗어 경쾌한 몸짓을 연출하여 균형 잡힌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춤추는 소녀라는 주제에 드가가 깊은 흥미를 가진 것은 풍부하고 자유스러운 형태와 다양하고 대담한 운동감을 추구할 수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드가는 볼륨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윤곽을 제일로 보았다. 모든 방향에서 균형이 이루어질 때까지 볼륨을 더하기도 하고 삭제하기도 하는 등 철저한 탐색을 거쳐 작품을 표현해 나갔다. 이 점은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는 것에 중요한 의미를 두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드가는 긴장감 있는 볼륨과 균형잡힌 구도를 통해 형상 조각의 진수를 확실하게 보여주었으며 나이 들어서도 왕성한 창작 의욕을 가지고 대담하게 형태의 추구를 모색해 나갔다. 그리하여 조각과 회화를 훌륭하게 융합시킨 열정적인 화가 겸 조각가로 현재까지 기억되고 있다.

 

 

 

단순화의 탐구, 마티스의 누드의 뒷모습 연작

19세기 말에서 20세기로 가는 전환기에 조각의 새로운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예술가로 화가 마티스를 꼽는다. 마티스(Henri Matiss, 1869-1954)로 로댕을 동경했으며 당대 최고의 동물 조각가 바리에에게 감명을 받고 부르델로부터 조각 레슨을 받기도 했다. 1899년인 30세부터 서서히 조각을 시작했는데 그의 야수파적인 회화와는 별다른 관련 없이 과감한 인체 분할을 시도했다. 마티스는 풍부한 양감 표현과 볼륨 있는 형태를 통해 입체감을 창조하여 조각이 3차원의 예술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정의했다. 

마티스와 로댕의 공통적인 요소는 점토를 사용하여 인간의 모습을 담은 형상성 있는 조각을 제작했다는 점이지만 목적은 서로 달랐다. 로댕은 극적이고 동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마티스는 조화와 균형, 안정감에 역점을 두었다. 이 점은 마이욜의 작품에서 보이는 요소들과 매우 흡사한데, 실제로도 마티스와 마이욜은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마티스는 피카소와 고갱, 독일표현주의 조각가인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와 헤켈이 그랬던 것처럼 아프리카 흑인들의 원시 조각에서 조형적인 표현성을 얻었다. <누드의 뒷모습> 연작이나 <자네트 두상> 시리즈는 흑인 조각의 영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누드의 뒷모습> 시리즈는 1909년~1930년 동안 4번에 걸쳐 제작한 부조이다. 인체가 단순화되어 가는 형식적 과정을 잘 보여주는 야심적인 조각으로 신석기시대의 여인 조각처럼 원시적인 여성상을 떠올리게 한다. 이 부조는 여자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이나 유희적인 관능미를 버리고 입체적인 표현과 통일된 구성에 역점을 두고 제작되었다. <누드의 뒷모습 I>에서는 관찰에 의한 해부학적 사실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누드의 뒷모습 II>는 약간 단순화시켰으나 기본적인 인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누드의 뒷모습 III>은 형태가 다소 경직되면서 조각적인 표현에서 벗어나 시각적인 단순함을 보여준다. <누드의 뒷모습 IV>에 이르면 형태가 극단적으로 단순화되고 양감의 표현이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지는 흥미로운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부조 시ㅈ리즈에서 머리카락이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주목해 보면 단순화되는 형식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여성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가지고 완전한 단순화를 이룬 이 작품은 부조에 있어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누드의 뒷모습 I~IV>에서 보이는 마티스 조각의 특성은 회화적 평면성과 조각적 양감 표현이 결합하여 이루어낸 단순화의 극치에 있다. 이처럼 사실적인 표현에서 시작하여 추상적인 단순함에 이른 그의 <누드의 뒷모습> 연작은 조각이 추상화되는 과정을 오랜기간에 거쳐 매우 성실하고 끈기 있게 연구한 실험성 강한 작품이다. 그 밖에 마티스의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자네트 두상>과 <비스듬히 누워 있는 누드> 시리즈가 있다. <자네트 두상> 또한 I~IV까지 이루어진 습작으로, 흑인 원시 조각의 영향을 받았으며 마티스의 정열을 유감없이 과시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티스는 그의 예술 속에 입체적인 형상이 혼합되기를 원했고 조각만이 형상에 이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조각을 시작했으며 창조적인 도전 의식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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