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인 역사 속에서 러시아 예술가들은 새로운 현실을 지향하는 조형 정신인 추상 예술을 창조했다. 혁명 전부터 1920년대에 걸쳐 소련에서 전개된 전위 예술 운동인 구성주의 Constructivism*는 타틀린(Vladimir E. Tatlin, 1885-1953)의 1914년 <콘트라릴리프 Contra-relief(구성주의적 부조)>라는 작품에서 발단이 되었다.
1913년 후반 타틀린은 파리로 피카소를 찾아가 조수가 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거절당하고 1914년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다. 이후 피카소의 입체주의 부조 작품 <기타>를 모방하여 유리, 철사, 철판, 나무 조각 등의 재료를 가지고 기하학적 추상 작품을 시도하는데 이 작품이 바로 <콘트라릴리프>이다. 그 후 말레비치, 칸딘스키, 페브스너, 나움 가보 등 여러 예술가들의 호응을 얻어 1913-1921년의 짧은 기간 동안 추상 조각 실험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이는 구성주의 운동으로 발전했다. 1917년에는 구성주의가 '예술의 혁명'으로 진전되어 정부의 미술 정책의 중심이 되었다. 그 후 공업 생산물의 사용과 예술의 사회적 효용성을 주장하면서 건축, 디자인, 무대 미술 등 1920년대 러시아 조형 예술 분야 전반을 지배했다.
초기에 타틀린은 페브스너, 나움 가보 형제와 뜻을 같이 했으나, 1919년 실용파와 순수조형파로 분리되면서 서로 멀어지게 되었다. 순수조형파였던 페브스너, 나움 가보 형제는 1920년 모스크바에서 '사실주의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조각의 양감과 볼륨 그리고 덩어리를 부정하고 운동의 리듬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주장했다. 또한 정치로부터 예술의 독립과 새로운 리얼리티를 표현하기 위한 조형적 의지가 요약되어 있다. 이에 자극을 받아 1921년 타틀린과 뜻을 같이하는 작가들이 모여 '구성주의 선언'을 했는데, '구성주의'라는 용어는 이때 만들어졌다.
1922년 러시아 정부의 예술 정책이 급변했다. 추상 미술이 대중과 거리감이 있다는 이유로 금지시키고 정치적으로 예술가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페브스너와 나움 가보 형제는 유럽으로 망명했다. 타틀린은 조국에 남아 활동을 했으나 1932년 정부의 탄압으로 구성주의 운동은 종결하게 되고 소련의 미술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이념으로 바뀌게 된다.
타틀린이 이룩한 구성주의의 대표 작품인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는 모형에 그쳤으나 예술과 기술의 종합이라는 감동을 전해주는 인상적인 작품이다. 1919년 러시아의 '순수미술부'로부터 주문받아 다음 해에 나무와 금속으로 제작된 모형을 소비에트 의회 전람회에 선보였다. 원래의 설계로는 약 400m 높이의 경사진 나선형 철골 구조체이다. 내부는 원통과 각뿔 외형을 지닌 큰 공간을 안고 있으며 원추 부분은 한 달에 한 바퀴씩 회전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부에서 강의나 회의 등을 열 수 있도록 건축물의 긴으까지 부여했다. 거대하고 웅장한 이 작품은 기계 시대의 도래를 상징하는 철과 유리의 기념탑이었다. 타틀린은 이 작품을 '실용 목적을 위한 순수한 예술적 형체의 통합'이라고 했으나 결국 경제적, 기술적 이유로 건설되지 못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스톡홀름의 근대미술관에서 모형을 기본으로 한 축소판 건설이 이루어져 늦게나마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
타틀린은 재료 사용에 있어서 이전에는 무관심하고 무가치하다고 생각되었던 나무, 로프, 코르크, 알루미늄, 가죽 등을 이용하여 진지하게 예술적 접근을 시도했다. 이에 따른 그의 조형적 특징은 현실 공간에 새로운 소재들을 구성하여 이미지를 형성하고 자연스럽게 생활 공간으로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점은 현대의 디자인과 건축 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 추상 조각을 비롯하여 모빌, 입체 구성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타틀린의 조형 정신은 지금 이 시간에서도 재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구성주의;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러시아에서 건축, 조각, 회화, 공예 등 예술의 전 분야에 걸쳐 발생한 혁신적은 추상 미술 운동. 기존의 재현적이고 장식적인 표현 방법을 버리고 순수 조형 형태만을 이용하여 작품화했다. 건축은 기능성을 강조하고, 조각과 회화는 기하학적인 추상을 추구했으며 주고 금속, 유리 등 공업사회의 부산물을 사용했다. 주요 작가로는 화가인 말레비치, 리시츠키 그리고 조각가인 나움 가보, 페브스너 형제, 로드첸코 등이며 1919년 독일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 운동을 통해 순수 예술 뿐만 아니라 디자인 계열의 전 분야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서양미술사 > 조각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술의 부정 뒤샹의 샘 (0) | 2023.06.22 |
---|---|
최초의 철조각가 곤잘레스 (0) | 2023.06.21 |
입체주의 조각가 자드킨 (0) | 2023.06.20 |
미래주의 보치오니 (0) | 2023.05.31 |
추상조각 브랑쿠시 (0) | 2023.05.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