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출신의 조각가이자 화가였던 쟈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는 예술적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화가였으며 동생들은 가구 장식가와 건축가였다. 1920년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방문하여 틴토레토, 조토, 치마부에, 이집트 미술, 비잔틴의 모자이크, 바로크 건축 등을 접하면서 쟈코메티는 큰 감명을 받게 된다.
1922년에는 파리에 정착하면서 입체주의풍의 작품을 보여주었다. 이때 부르델의 아틀리에에서 수업을 받았는데 아틀리에를 그만두고 기억과 상상에 의한 조각을 시도했다. 그리고 1930년에 아르프와 함께 초현실주의 Surrealisme* 운동에 참가하게 된다. <새벽 4시의 궁전>과 같은 작품은 초현실주의의 영향에 의해 제작된 작품이다. 그러나 1935년 초현실주의를 이탈한 쟈코메티는 모델 작업에 열중하면서 인체로 되돌아왔다. 그로부터 10년 후 드디어 그가 추구하고자 한 것에 가까이 도달한 가늘고 긴 조각상들이 탄생했다.
쟈코메티의 고독과 불안에 떨고 있는 듯한 인체상이 나온 데는 피할 수 없는 배경적 요인이 있다. 그건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시련과 쟈코메티 자신의 예술적 성장기에 난립했던 다양한 표현 수단들(추상표현주의, 해프닝, 네오다다, 아상블라주, 팝 아트 등)로 인한 불안감이었다. 불확실한 시기에 청년기를 보낸 쟈코메티는 인간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품으며 인간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긴장과 공허함에서 발생한 철사처럼 가늘고 기다란 직립 인간들은 공간 구성의 탐구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 점이 쟈코메티의 조형 예술에 있어 독보적인 개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을 가까이서 보면 울퉁불퉁한 기복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먼 거리에서 보면 형태가 명확히 보인다. 이처럼 쟈코메티의 인물은 일정한 거리에서만 모습을 나타내는 전체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 <도시의 광장>은 직립 군상으로서 빈 공간에서 느끼는 공허와 거리감 그리고 허무감을 보여주는데, 특히 좌대의 넓은 면적은 군상들과 대비를 이루어 공허한 작품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쟈코메티의 군상은 좌대가 동판이나 석대로 이루어져 있어서 작품과의 긴장된 공간감을 증대시키고 숙명적인 불안이나 고독과 같은 감정을 두드러지게 한다.
역사적으로 군상들은 기념비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으나 쟈코메티의 군상은 인간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의 현실성을 나타내려 했다는 데 색다른 의미가 있다. 쟈코메티의 조형상의 특징은 거칠고 침식된 것 같은 표면과 볼륨을 쥐어짠 듯 응축된 덩어리 그리고 구축적인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쟈코메티의 독특한 표현인 주물러놓은 듯한 자연스러운 표면의 질감은 항상 그가 주머니에 흙을 넣고 다니면서 만지작거렸던 일상적인 행위가 빚어낸 창조적인 결과이다. 한편 쟈코메티는 모델을 보고 묘사하는 초상 제작과 자신의 조각과 동일한 감각을 느끼게 해주는 소묘 작품 등을 하나의 독립된 영역으로 발전시켜나가는 열의를 보였다.
철학자 사르트르가 쟈코메티의 작업을 가리켜 '절대의 탐구'라고 한 것은 그의 조각의 성격을 가장 잘 대변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인체를 단순화시켜 결국 가느다란 선에 도달하도록 만든 쟈코메티의 신념과 독자성은 오래도록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대표작으로는 <가리키는 남자>, <거리>, <빗속을 걸어가는 남자> 등이 있다.
*초현실주의(Surrealisme); 1919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약 20여 년간 지속된 전위 예술운동. 원래는 문학으로부터 출발했으나 점차 예술 전반에 걸쳐 폭넓게 확산되었다. 앙드레 브르통에 의해 1924년과 1929년에 초현실주의 선언문이 발표되었는데,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초현실주의의 목적을 "이전의 꿈과 현실의 모순된 상황을 절대적 현실, 초현실적 상태로 변형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곧 무의식의 세계와 꿈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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