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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조각사

이집트 미술 조각

by _____seula 2023. 5. 16.

이집트 미술의 상징,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나일강을 중심으로 비옥한 땅과 황무지 사막의 상반된 자연환경이 함께 어우러져 발생한 이집트 문명은 메소포타미아보다 기름진 땅을 가지고 부를 축적하여 인류 최대의 문명으로 발전했다. 채집과 수렵 활동에서 농경 사회로 전환한 인류의 문화는 씨족 중심의 부락에서 왕조가 성립되는 도시국가로 주술적인 원시 신앙에서 신화 중심의 종교로 발전되었다. 강력한 왕권의 절대적 영향 하에 이집트 문명이 탄생했다. 
통일된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이집트는 왕권 중심의 사회였고 왕이 곧 신과 같은 존재로서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집트는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당하고 기원전 30년 로마인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약 3000년간 번영을 이뤘다. 
이집트 왕조는 초기 왕조 시대, 고왕국 시대, 중왕국 시대 그리고 이집트 최고의 문명을 이룩한 신왕국 시대, 마지막으로 말기 왕조 시대로 구분한다. 특히 고왕국 시대의 미술 작품들은 이집트 3000년의 역사를 대변할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하다. 기자 지역의 정밀하고 단순한 피라미드를 비롯하여 정면 부동성의 법칙을 지니고 있는 멘카우라 왕과 왕비, 카프라 왕의 좌상, 촌장상, 서기상 등 모두 고왕국 시대의 작품이다. 이집트의 건축과 조각을 대표하는 왕의 분묘 피라미드와 거대한 신상 스핑크스는 이집트인들의 영원불멸에 대한 기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피라미드는 사후의 영적인 세계를 위한 분묘였다. 그 안에 매장된 조각상과 미라 역시 사후의 영원 세계를 위한 염원으로 만든 것으로 신앙에 가까운 행위로 볼 수 있다.
제3왕조의 왕 제세르 왕 이후 만들어진 피라미드는 왕조의 절대권력과 위엄을 상징한다. 현재 이집트에 분포된 80여개의 피라미드 중 제4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기자 지역의 피라미드를 최고로 꼽는다. 당시 천문학적 지식도 미흡했고 건축, 토목 기술과 장비 또한 부족했음에도 쌓아 올린 돌과 돌 사이의 틈이 종이 한 장 정도 차이밖에 나지 않는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으며, 네 개의 각 면이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정확성을 갖추고 있다. 나일강 지역은 거대한 조각상이나 분묘를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는 물량과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피라미드의 돌은 나일강 기슭과 사막의 석회석으로 돌 한 개의 무게가 평균 2~3톤에 이르며, 거대한 돌은 나일강의 범람을 최대한 이용하여 이동시켰다. 가장 크고 오래된 쿠푸왕의 피라미드에는 약 230만 개의 돌이 사용되었고, 매년 40만명의 노동자가 20년 동안 일해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고 난 후에도 현세와 똑같은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곧 신앙이 되었고, 파라오는 곧 신의 대변인으로서 영원불멸을 갈구했다.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영혼이 머무를 무덤이라고 생각했으며, 미라로 만든 파라오의 시체는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미로를 통해 매장실에 안치하고 통로를 봉쇄했다. 미라를 잘 보존하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시체가 부패하지 않도록 심장만 남기고 내장을 모두 제거하고 특별한 약품을 처리하여 황금관으로 감싸 보존했다. 
이집트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조형물, 기자 피라미드 옆 동물 모양의 거대한 조각상 스핑크스이다. 스핑크스는 엄청난 힘을 가진 동물과 지배자인 왕과 자비로운 신을 결합한 형태이다. 하나의 거대한 암석으로 된 산을 깎아서 조각했으며 묘지를 지켜주는 수호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인간의 얼굴에 사자의 갈기로 둘러싸여 있는 얼굴 그리고 몸통 역시 사자 형상을 하고 있다. 인간과 동물을 합성한 모습의 스핑크스는 아시리아의 라마수에서도 그 유래를 볼 수 있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이집트의 스핑크스는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파손되었으나 유네스코에 의해 대대적으로 보수되었다. 코와 볼의 파손 흔적은 아직 남아있으나 위용은 당당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형식에서의 일탈, 이집트의 촌장상과 서기상
고왕국 시대를 정점으로 이집트 미술은 규범화되고 획일화된 방법이 반복, 답습되었다. 정면 부동성이 두드러진 초상 조각은 파라오의 영원성과 신성에 결부되어 지속되었다. 하지만 틀에 박힌 형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실험을 시도한 조각 작품이 있는데 촌장상과 서기상이 대표적인 예이다. 촌장상과 서기상과 같이 개인 조각은 이집트 사회의 신분 제도 관점에서 볼 때 왕가의 인물에서 벗어난 인물인 하인이나 평민, 노예들을 조각한 것을 말한다. 석회석으로 조각된 다수의 흥미 있는 인물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왕의 분묘 속에 넣어 시종 역할을 하려는 목적으로 추측된다. 
촌장상은 프랑스의 이집트 연구 고고학자에 의해 이집트의 오래된 도시 사카라의 마스타바에서 발견되었다. 파라오나 왕족을 표현한 관념적인 조각상과 달리 촌장상은 직접적인 관찰에 의해 제작된 것이라고 짐작된다. 섬세한 관찰에 기반을 둔 사실주의적 태도는 눈의 표현에서도 느낄 수 있다. 생동감을 주려는 의도로 눈의 흰자위에 흰색 석영을 끼워 넣고, 눈동자에는 쇠못을 박고 눈 주위는 금속으로 치장했다. 정확한 비례를 가진 두 눈과 코, 입과 섬세한 귀의 표현은 사실적 조각을 위한 방법이 동원되었음을 뒷받침한다. 
서기들은 문자를 쓰고 해독하며 후세에 남기는 중요한 일을 했기 때문에 상당한 지위와 부를 누렸으며, 일반인은 서기라는 신분에 존경심을 품었다. 서기상은 좌상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약간 경직된 듯한 곧은 자세를 보이고 무릎 위에 종이 두루마리를 펼치고 있다. 둥그스름하게 주름진 배는 문맹 사회에서 사무직의 권위와 부를 표현한 것이며, 정면을 바라보는 얼굴은 예리한 인상을 풍기며 생생한 사실성을 전달하고 있다. 촌장상과 서기상은 이집트 미술에서 보편적이었던 관념성과 양식화된 유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탁월한 수작이다. 

 


이집트 미술 최고의 걸작, 네페르티티 왕비의 흉상
전 이집트 조각품 중 가장 탁월한 흉상 조각인 네페르티티 왕비의 흉상은 독일 발굴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집트에서는 보기 드문 흉상 형식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눈은 유리로 상감하여 박아넣었다. 커다란 원통형의 관을 쓴 왕비의 아름다운 얼굴과 화려한 자태는 이지적이면서도 냉정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어 절대 왕권을 공유하고 있었던 왕비의 영향력을 짐작하게 한다. 
놀랄만한 세련미와 사실적 표현, 커다란 눈과 오똑한 코 그리고 굳게 다문 단호한 입술 표현은 과장되지 않은 사실적인 인물 표현을 보여준다. 이목구비와 목의 정확한 비례 감각은 조화로운 형태감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집트의 전통적인 양식, 정면 부동성을 부드럽게 완화시켜 새로운 형상을 창조해낸 점이 위대한 이유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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