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의 시작, 죽어가는 갈리아인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는 그리스를 정복했고 뒤를 이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난 후 제국은 군주들에 의해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 그리고 현재 터키 지역인 페르가몬까지 총 4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이들 4개 왕국 중 이후 로마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이집트 마저 악티움 전쟁에서 정복당하자 헬레니즘 세계는 막을 내렸다. 역사적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제국 정복(기원전 330년)에서 로마의 이집트 정복(기원전 30년)까지 약 300년 동안을 헬레니즘 시기라고 한다. 이 시기에 그리스는 정치적 중요성을 잃게 되었고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이 오리엔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동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등으로 문화가 파급되었는데 분열된 네 왕국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렇지만 그리스라는 문화적 바탕이 없었다면 이처럼 민족을 초월한 세계적인 문화의 전파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안정한 시대였던 그리스 말기의 헬레니즘 미술에서는 예술의 중심적 위치에 있던 아테네가 그 지위를 잃고 오리엔트 전제 군주 제도로 바뀌면서 왕이나 영웅, 투사 등의 초상조각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내용에 있어서도 현실주의적인 세계관이 팽배한 가운데 인간의 관능과 감정에 호소하는 격정적인 표현이 나타남으로써 신상과의 관련은 점차 멀어지게 된다.
<죽어가는 갈리아인>은 헬레니즘 중기의 조각으로 강한 사실주의로 진한 호소력을 발산하고 있다. 남성의 나체로, 고통스럽지만 위엄 있는 표정을 내비치고 있는 이 조각상은 깊은 상처로 인한 죽음의 고통을 끝까지 극복하고 감내하려는 전사의 이미지를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또한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상체의 무게를 두 팔로 받치고 있는 표현은 상당한 동정심을 유발하고 있다. 이 작품은 고전기에 나타났던 인위적이고 우미주의적인 경향과는 다른 감동적인 리얼리티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 때문에 <죽어가는 갈리아인>은 헬레니즘 조각의 새 장을 여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페르가몬의 왕 에우메네스 2세에 의해 세워진 페르가몬 대제단(제우스 대제단)에 있는 이 작품은 페르가몬 인들이 동쪽의 야만족 갈리아인을 상대로 한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려고 만든 것으로 기원전 210년경의 청동 원작을 로마에서 대리석으로 모각한 것이다. 억세게 보이는 짧은 머리와 얼굴 모양, 그리고 목걸이에서 갈리아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갈리아 정복을 기념하여 세운 신전 조각품에는 <죽어가는 갈리아인> 외에도 갈리아인이 자기 아내를 죽이고 함께 자살하는 <갈리아인과 그의 처(아내)>가 있는데 <죽어가는 갈리아인>에 버금가는 매우 극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헬레니즘기 조각의 일반적인 특징은 노파, 어부, 권투사, 흑인 등 평범한 인간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사실감 있게 표현했다는 점으로, 이는 고전기의 신앙에 관련된 이상과 매우 동떨어진 것이다. 재료의 사용에도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는데, 청동 주조 외에도 좀 더 직접적인 생동감의 표현을 위해 테라코타가 사용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헬레니즘 조각에서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할 점은, 엄숙하고 숭고한 관념성에서 벗어나 휴머니즘에 호소하면서 생생한 감동을 전달하고자 하는 미적 태도를 지녔다는 것이다.
극적인 운동감, 보르게제의 전사
살아 숨 쉬는 듯한 생동감과 극적인 운동감의 인체 조각은 그리스 미술의 아르카익기와 고전기에는 볼 수 없었던 헬레니즘기 조각의 특징인 동시에 새로운 표현력이다. 역동성과 운동감이 한눈에 보이는 작품 <보르게제의 전사>는 어디에서 보아도 균형 잡힌 구조를 지닌 조각으로, 더 이상 조각적인 요소를 끄집어내어 열거하는 일이 불필요할 정도다. 로마 시대의 모각으로 보이는 이 전사의 대리석 조각은 당시 최고의 조각가가 아니고서는 이렇게 능수능란하게 조각하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될 만큼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 <보르게제의 전사>는 비대칭에서 오는 힘찬 율동과 적절하고 시원스럽게 뻗은 팔과 다리의 동작이 3차원적 입체감을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조각은 오른팔로 상체의 균형을 이루고 왼손으로는 창을 잡고 던지려는 순간을 표현했다. 길고 팽팽하게 뻗은 오른쪽 다리와 여기에 연결되는 상체의 직선 구조는 당시의 조형적 태도로는 파격적인 자세이다. 해부학적인 지식에 바탕을 둔 연구와 노력 없이는 이처럼 유연한 이체 표현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상체와 두상을 보면 다소 어색함이 느껴지는데, 상체와 목 그리고 두상의 방향이 다분히 인위적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박진감 넘치는 표현을 위해 때로 심하게 과장하는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고전기에 나타났던 관념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표현은 르네상스 시대 미켈란젤로의 메디치 가의 분묘 조각에서도 볼 수 있다. 해부학적인 면에서 심각하게 벗어난 줄리아노의 길게 뻗은 목의 균형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는 관념에 의한 우수를 의식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헬레니즘 조각에서는 순간적인 장면이나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이 중요한 특징으로 거론된다. 세속화된 주제를 포함시킴으로써 조각이 감상의 대상으로 변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 걸맞게 나체의 조각 형태가 심화되어 갔으며 때로는 왕과 귀족의 예속물로써 장식적인 요소까지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보르게제의 전사>는 이러한 범주와 확연히 구별되는 자율성을 지니고 있기에 더욱 빛이 난다. 즉, 최대한의 움직임을 통해 공간의 점유를 해결함으로써 독특한 시각적 유쾌함과 생동감을 전해주고 있는 인체 조각으로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승리의 여신, 사모트라케의 니케
헬레니즘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승리의 여신상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기원전 191-190년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와 벌인 해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로도스 사람들이 신전에 봉납한 것이다. 1863년 에게 해 사모트라케 섬의 성역 터 한쪽 구석에서 발굴되었고 1950년 같은 장소에서 오른쪽 팔이 발견되었다. 이 승리의 여신상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후 분열된 네 개의 왕국 중 페르가몬 왕국의 양식에 기원을 둔 작품이다. 분할된 왕국들은 그리스 고전기의 이상적인 미술양식을 모범적으로 계승하면서 새로운 왕조의 존재를 부각하고 권위를 내세우고자 했다. 특히 페르가몬 왕국의 조각과 신전 건축물이 그 예이다.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페르가몬 왕국의 웅장하고 극적이며 격정적인 미술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현재 루브르 미술관 2층 입구에 우뚝 솟은 듯 서 있는 이 조각상은 높이가 240cm로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사실적인 표현과 연극적인 요소를 가미시킨 <사모트라케의 니케> 조각상은 기술적인 기교의 극치를 보인다. 이 조각상은 거대한 양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에서 날아와 뱃머리에 막 내려앉으려는 순간을 극적으로 조각했는데 강한 바람 때문에 착지하지 못하고 떠 있는 듯하다. 실제로 바닷바람이 부는 듯한 생생함과 앞으로 나아가려는 운동감 사이의 놀랄 만한 균형은 순간의 공간성을 느끼게 해 준다. 몸 전체를 휘돌아 감싸고 있는 젖은 옷의 느낌은 파르테논 신전의 페디먼트 조각인 <세 여신>에서 볼 수 있었던 양식으로, 이러한 표현 방식은 옷을 걸친 여인상과 신의 표현에서 일반적으로 쓰였다. 이와 유사한 옷주름의 표현이 불상 조각에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리스 문화가 동방으로 전파되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예이다.
날개를 갖고 하늘을 나는 신의 표현은 <사모트라케의 니케>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의 라마수, 그리스의 켄타우로스, 그리고 페가수스 등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날개 달린 신의 표현에서 <사모트라케의 니케>를 최고로 꼽는 이유는 실제로 하늘을 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사실성에 있으며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날개 달린 신의 모습으로 승화시켰다는 점 때문이다. 다이내믹한 형태와 생기 넘치는 포즈, 힘찬 옷자락의 표현을 지닌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헬레니즘 시대 사람들의 미적인 감수성을 간직한 채 현대인에게도 그 아름다움을 전해주고 있다.
예술의 기적 라오콘 군상
트로이의 함락, 노여움, 벌, 그리고 죽음···. 라오콘과 두 아들이 독뱀에 감겨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죽어가고 있다. <라오콘 군상>이라고 불리는 이 조각상은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최고의 걸작이다.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 군이 목마를 보내 트로이를 함락하려고 하자, 계략을 간파한 신관 라오콘은 시민들에게 경계하라고 이르며 목마를 향해 활을 쏘았다. 그러자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크게 분노하여 육지를 향해 두 마리의 커다란 독뱀을 보내 라오콘의 두 아들을 공격했고 두 아들을 구하려고 뛰어든 라오콘 역시 뱀에 감겨 죽음을 당한다. 이 신화는 라오콘의 무례한 행동에 대한 신의 노여움을 나타낸 것이다.
헬레니즘기의 조각으로 현존하는 군상 조각 중 가장 유명한 <라오콘 군상>은 3명의 조각가가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플리니우스에 의하면 페르가몬 파 이후 헬레니즘 조각의 주류를 이룬 로도스 섬 출신의 아게산드로스, 폴리도로스, 아테노도로스이다. 그러나 이 대리석 조각상이 5개의 부분으로 조립되었다는 점과 보존 상태로 미루어 볼 때 청동 원작을 로마 시대에 대리석으로 모각했을 것이 확실하다. 이 작품에서 라오콘은 커다란 독뱀에게 옆구리를 물려 무의식적인 고통 속에 빠진 듯하다. 오른쪽에 있는 아들은 숨을 거두었고 왼쪽의 아들은 뱀에게 감긴 팔과 다리를 빼내기 위해 격렬하고 저항하고 있어, 죽음의 순간에서 벗어나려는 절박함을 극적이고 생생하게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삼각형 구도는 다소 불균형적이며 뱀이 무는 장면 역시 위협적이지 못해 비장미를 떨어뜨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헬레니즘 말기에는 자극적이고 격한 상황을 사실적으로 표현했으며 극적인 주제와 연극적인 요소를 의식적으로 첨가하여 역동성을 강조했다. 이런 점은 기원전 180년경의 페르가몬의 제우스 신전터에 있는 프리즈 조각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잘 알려진 <아테네와 알키오네우스>에서 볼 수 있는 숨 막히는 격렬함과 힘센 근육의 운동감이 좋은 예이다.
현재 <라오콘 군상>은 로마 바티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르네상스 시기에 로마 에스킬리노 언덕의 티투스 황제 궁터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르네상스 미술가들과 18세기 독일의 문필가들인 빙켈만, 괴테, 레싱 등은 많은 감동을 받아 글로 남기기도 했다. 특히 미켈란젤로는 <라오콘 군상>의 발굴 작업에 직접 참여했는데 <라오콘 군상>이 땅속에서 나올 때 "이것은 예술의 기적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발굴 당시에는 파손이 심했고, 양팔과 양다리가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당시 최고의 조각가이며 고전기 조각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미켈란젤로에게 보수를 의뢰했으나 "내 기량으로 도저히 불가능하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경 본체에서 떨어져 나갔던 오른쪽 팔이 발견되어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현재의 조각상으로 복원되었다. 제작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기원전 150년~기원전 50년 사이로 보고 있다.
여성미의 완성, 밀로 섬의 비너스
시대의 흐름에 따른 조형 형태의 변화는 그 시대의 미의 관점과 저변에 깔린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정치적 영향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리스 미술의 세 시기도 뚜렷이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아르카익기의 조각은 부동의 자세와 고졸한 미소가 특징이며, 고전기는 균형 잡힌 자세와 신전 건축에 의한 숭고한 정신성을 떠올릴 수 있고, 헬레니즘기의 조각에는 사실성에 기반을 둔 인간의 감정이 설득력 있게 표현되어 있다. 여성상의 변화에 있어서도 주목할 만한 사실은 해부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얼굴 형태의 변화이다. 초기 그리스 미술에 나타난 <코레>의 얼굴 형태는 매우 투박하며 턱이 두꺼워 남성과 같은 형태의 윤곽을 지녔는데, 고전 전기와 후기에 오면서 여성의 얼굴이 갸름한 형태를 지니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적 불안과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는 현세적인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이다. 헬레니즘기에는 얼굴형이 뾰족해지고 턱이 작아져 매우 유약한 이미지로 변화되며, 이러한 헬레니즘기 여성상의 얼굴 형태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 <밀로 섬의 비너스>이다. 프락시텔레스의 비너스 이후 그리스에서 제작된 여성상은 점점 관능적이고 세속적으로 변해왔는데 바로 이 시점에서 <밀로 섬의 비너스>는 여성미의 완성을 의미하는 결정체로 탄생했다.
현존하는 인류의 조각품 중 가장 유명할 뿐 아니라 아름다움의 원류로 일컬어지는 <밀로 섬의 비너스>는 널리 대중들에게 인기와 사랑을 받아왔다. 사랑스러운 미의 여신으로 대변되는 비너스는 그리스 신화 중 가장 많은 주제로 다루어졌고 2000여 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움의 가치 기준을 제공해주고 있다. 높이 약 2m의 대리석으로 된 이 작품은 1820년 에게 해의 밀로 섬에서 밭갈이하던 농부가 발견했다. 마침 이 섬에 정박한 프랑스 해군이 입수한 후 이듬해 프랑스의 리비에르 후작이 구입하여 프랑스로 옮겼고 루이 18세에게 증여되어 루브르 미술관에 수장되었다. 반나체의 이 비너스는 엉덩이 부분에 옷이 걸쳐 있는 상당히 매혹적인 자태의 전신상으로 양팔과 왼발이 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그리스 초기 작품으로 생각했으나 연구 결과 기원전 130-100년경의 헬레니즘 작품으로 결론짓고 있다. 이 비너스의 비례나 구조는 안정적인 자세와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등을 약간 앞으로 구부린 유연한 자세는 육감적이고 관능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그리스 신화에서 그려지고 있는 이상적인 비너스의 모습이 아니라 현실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운 여인상 그 자체이다. 그러나 과장되어 길게 늘어진 신체 구조는 다소 비현실적이고 비고전적인 형태미를 보여주고 있다. 8등신이 훨씬 넘는 비례에서 의도적인 왜곡을 확인할 수 있다. <밀로 섬의 비너스>는 양팔이 없는 상태로 오랫동안 보아왔기 때문인지 마치 비너스의 원형은 양팔이 없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인류의 조각사를 보건대 무수히 많은 비너스 중 장엄한 미를 내뿜고 있는 <밀로 섬의 비너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다. 비너스를 탄생시킨 그리스 문화의 중요한 의미는, 미술 전반은 물론이고 신전 건축조차도 인간 존중 사상에 기반을 두었다는 점이다. 그리스의 자유 정신과 인간 중심이라는 정신적 바탕은 오늘날 유럽 문명의 모태가 되었으며, 세계 문화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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