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 조각, 뤼드의 라 마르세예즈
격동에 찬 혁명과 계몽주의를 통해 유럽은 과거를 버리고 근대로의 행보를 선택했다. 새로운 시대는 젊은이들에게 전통에 따른 고대주의에 반발하고 자아의 세계에서 창조의 절대성을 찾도록 부추겼다. 결국 신고전주의의 개념적인 형식주의에 반항하고 현실과 상상의 세계에 열중하도록 하는 풍조가 생겨났는데 이는 낭만주의를 탄생시키기에 충분한 정서였다. 낭만주의는 문학에서 먼저 나타난 것으로 미술 양식 개념이 아니었다. 따라서 미술사에 명백하고 독자적인 양식이 성립된 것은 아니며 새로운 형식을 창조한 것도 아니다. 낭만주의는 나폴레옹의 출현을 계기로 보편성보다는 개성을, 유형보다는 성격을 존중하는 기본적인 특징을 띠고 있다. 신고전주의의 까다롭고 딱딱한 규범에 반발함과 동시에 그리스, 로마적인 것을 버리고 중세의 고딕 양식을 지향하면서 자아의 감흥, 상상력, 자연의 숭고함, 자유와 사랑 등 끊임없는 감정 표현을 숭배했다. 정서적인 자유와 무한한 것에 대한 동경이라는 전반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낭만주의에는 이처럼 '반아카데믹'과 '반신고전주의'가 저변에 깔려 있었다. 낭만주의 시대 조각은 회화의 자취를 그대로 좇았는데, 낭만주의를 조각에 적용하기에 다소 무리가 따랐던 것이 사실이다. 이유는 조각의 형식적인 특징인 공간을 채워야 하는 현실성이 낭만주의적 기질에는 근본적으로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낭만주의 조각이 신고전주의의 몰개성적이고 예쁘기만 한 조각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점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1820년경 낭만주의 조각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1822년 낭만주의 운동의 지도자인 화가 들라크루아를 출발로 조각계에도 그 영향이 미친 것이다. 신고전주의의 형식미는 젊은 조각가들의 제작 의욕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그들은 개성이 표출되기를 원했는데 이러한 낭만주의적 이상에 가장 근접했던 프랑스의 조각가들로 뤼드, 바리에, 카르포, 프레오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 뤼드(Francois Rude, 1784-1855)는 조각계에 있어서 낭만주의의 뿌리를 살려준 작가로 인정되고 있다. 프랑수아 뤼드는 신고전주의 조각가 카르톨리의 조수였다. 뤼드는 혁명 옹호자였으며 열렬한 나폴레옹 지지자였기 때문에 1814년 나폴레옹 몰락 후 벨기에로 망명했다. 1827년 다시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는 낭만주의 계열의 작가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그는 고전에 깊이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작품의 격렬한 움직임과 힘차고 당당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여러 요소에서 고전미가 느껴진다. 이러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그의 대표작 <라 마르세예즈>는 현재 파리의 중심부에 위치한 에트와르 개선문의 동쪽 기둥 정면의 석조 부조로서, 혁명의 열광을 재현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개선문은 나폴레옹 1세를 위해 건축되었는데 로마 시대 개선문의 양식을 본떠 프랑스의 위대함을 과시하려는 열망이 담겨 있었다. 돌출이 심한 고부조의 <라 마르세예즈>는 1792년에 공화제 방위를 위한 지원병 소집이라는 역사적인 일화를 담고 있다. 작품 속의 지원병들은 혁명의 열기에 휩싸여 있고 그들 위에 있는 자유의 여신은 대중들에게 정열적으로 애국을 외치고 있다. 찡그린 얼굴과 외치는 입, 휘날리는 깃발과 거침없이 뻗은 팔과 다리, 이 모든 것은 동적인 힘을 강조하고 있으며 강한 대각선 구도의 사용으로 구조적인 힘을 내포하고 있다. 극적인 인물의 구성과 격한 운동감의 표현은 조각에 생명력을 되찾아주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서술적 사실주의는 군중을 선동하는 구호성 짙은 내용으로 말미암아 당시 사람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뤼드는 아카데미 회원 가입에 3회나 거부당하는 서러움을 겪기도 했지만 19세기 중엽 뤼드의 출현이 프랑스 조각계에 활기를 준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뤼드는 나폴레옹을 위한 전신 조각상 <불사의 나폴레옹>과 <몽주 흉상>같은 초상 조각도 제작했는데, 심리적 묘사가 뛰어났으며 순간적인 행위를 포착하며 극적으로 표현했다. 또한 뤽상부르 공원 입구에 있는 <4인의 원수상>은 격렬한 동적 표현으로 로댕에게 격찬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동물 조각가, 바리에
고전주의 작가들이 인간과 신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은 데 비해 낭만주의 조각가들은 보다 폭넓은 시선을 가지고 동물들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동물을 주로 다루었던 대표적 조각가로는 바리에(Antoine Louis Barye, 1796-1875)와 퐁퐁(Francois Pompon, 1855-1933)을 들 수 있다. 그중 프랑스 조각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위대한 동물 조각가 바리에는 날카로운 자연 관찰과 이국적인 정취가 융합된 특이한 작품을 선보였다. 바리에는 14세 때 퓨리에의 제자로 조각을 배웠고 파리에 있는 동물원에 드나들면서 동물을 스케치하고 연구한 결과 동물 군상의 선구자가 되었다. 1831년 그는 <인도 악어를 잡아먹는 호랑이>를 처녀작으로 발표했는데, 역동적인 호랑이의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듯 착각할 정도로 사실적이고 생동감 넘치게 표현되어 대단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1833년 발표한 <사자와 뱀>은 관찰을 통해 사자를 사실적으로 묘사했고, 동물들이 먹고 먹히는 현장을 매우 생생한 느낌이 나도록 표현했다. 이 작품은 1830년 7월 혁명이라는 정치적 내용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대중들이 왕조의 비열함에 대항하여 승리하게 된 것을 동물들의 신체를 빌어 교묘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렇게 동물 조각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고독하게 개척해 나간 바리에가 진정한 동물 조각가로서 인정받게 된 것은 1850년 제작한 <산토끼를 잡아먹는 재규어>를 선보이고 나서다. <산토끼를 잡아먹는 재규어> 역시 <인도 악어를 잡아먹는 호랑이>나 <사자와 뱀>처럼 두 마리의 동물을 등장시켜 사실적인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바리에의 모든 작품은 뛰어난 관찰력을 바탕으로 낭만적인 조각의 예를 제시하며 발전했다. 바리에의 해부학적 세부 묘사는 놀랄 만한 정확성과 흠잡을 데 없는 기교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에 못지않은 뛰어난 주조 기술은 19세기 중엽의 조각가로서는 매우 드물게 지니고 있는 특색이다. 바리에는 동물 조각뿐만 아니라 신화를 주제로 한 <켄타우로스와 라피타이>, 풍만한 자태의 <전쟁과 평화>, 조용하고 안정감 있는 <힘과 질서> 등 극히 아카데믹한 건축 조각도 제작했다.
로댕의 스승, 카르포의 댄스
냉철하고 정돈된 고전주의 표현을 뒤로하고 다양하고 약동하는 낭만주의를 대두시킨 19세기의 대표적 조각가 카르포(Jean Baptiste Carpeaux, 1827-1875)는 로댕의 스승으로서 로댕이 출현하기 전까지 프랑스 조각계를 지탱해 준 사람이었다. 카르포는 미술 학교에서 건축을 배우고 조각가 뤼드에게 수업을 받았으며 특히 석공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이 지대했다. 이후 미장 일을 시작으로 각종 건축물이나 조각의 모형 만드는 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조각을 시작했다. 건축 조각 분야에서 뤼드 못지않은 실력을 과시했던 카르포는 1854년 로마상을 받았으며 이윽고 로마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메디치 가에 체류하면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성공적으로 완성한 작품으로 1860년에 만든 <우고리노와 그의 아들>을 꼽을 수 있다. 다시 파리로 돌아온 카르포는 나폴레옹 3세의 신임을 얻어 왕족과 귀족들의 초상 조각 및 세 가지 중요한 공공 조각을 주문받게 된다. 그것은 파리 루브르 궁 뒤쪽 튈르리 공원의 장식 부조 <꽃의 여신<플로라)>과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문대의 샘> 그리고 오페라 극장 정면에 있는 <댄스>이다. 이 중에서 <댄스>는 오페라 극장의 건축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요염하고 쾌활한 인물들을 통해 밝고 자연스러운 현실을 표현했다. <댄스>의 인물 크기는 4.6m인데 훨씬 작아 보이는 느낌을 주고 있으며, 누드의 표현에 있어서도 다소 부자연스러운 어색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공예적인 로코코의 요소 즉, 장식적이고 작은 조각상 위주였던 로코코 조각의 요소들을 낭만주의적 요소와 융화시키지 못하고 비판 없이 수용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댄스>는 그 표현이 환상적이고 매혹적인데, 중앙의 탬버린을 든 무회에서는 흥겹고 즐거운 율동이 보이며 주위 요정들의 동세에서는 격한 리듬감이 느껴진다. 이처럼 <댄스>의 여성상에는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고전 양식에서 벗어나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표현을 과감하게 시도한 흔적을 보이고 있다.
당시 오페라 극장을 건축할 때 카르포를 포함하여 여러 조각가들이 정면의 조각을 담당했는데 <댄스>를 비롯하여 <하모니>, <음악>, <오페라> 등 4가지의 주제로 조각했다고 한다. 현재는 카르포의 <댄스>만이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카르포의 능력과 표현력을 다시 한번 입증하고 있다.
카르포의 현실성이 강한 사실적인 표현은 침체되었던 조각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뿐만 아니라 근대 조각의 거장 로댕과 표현 굴곡의 유연함으로 빛의 강약을 보여준 로소(Medardo Rosso, 1858-1928)*에 앞서 명암법**을 중시한 조각가로 인정되며, 그의 제자 로댕의 성장에 미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로소: 로소는 19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이탈리아 조각가로서 처음에는 그림을 그리다가 1884년 조각으로 전환했다. 파리로 건너가서 로댕과 절친한 사이가 되며 그의 영향을 받는다. 로댕과 함께 인상주의 조각가라고 불리는 이유는 형태의 개념을 버리고 인상파 화가들처럼 빛과 음영을 조각해야 한다는 동일한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명암법: 고유의 색과 특징 있는 윤곽선을 피하고 빛과 그림자의 강약에 의해 물체를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이다.
'서양미술사 > 조각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대 조각 로댕 (0) | 2023.05.20 |
---|---|
사실주의 미술 조각 (0) | 2023.05.19 |
신고전주의 미술 조각 (0) | 2023.05.19 |
로코코 미술 조각 (0) | 2023.05.19 |
바로크 미술 조각 (0) | 2023.05.19 |
댓글